[단편소설] 홍콩 한인들의 슬픈 이야기 - 니가 사는 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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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단편소설] 홍콩 한인들의 슬픈 이야기 - 니가 사는 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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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사는 집 2


지난 몇 달간 현미가 만나본 다혜는 괜찮은 기억의 사람이었다. 첫 해외 생활이라 겁도 많았지만 뭘 알려주면 열심히 해보려는 다혜였다. 영어는 잘하는 편이 아니어도 용감하게 뭐든 해보려 했다. 홍콩 생활에 정착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려는 자세였다. 정보든 음식이든 얻은 게 있으면 작은 거라도 다시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현미는 다혜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이나 말에 대해 뭔가 불편한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번은 현미가 다혜와 함께 길을 가다 어떤 여자들과 눈인사하더니 그들이 사라진 뒤 '재수 없는 여자들'이라고 대뜸 말했다. 집안 중요한 일을 남편과 가정부에게 다 맡기고 여행객처럼 놀러만 다니는 여편네들이라고 탐탁지 않은 듯 말했다. 그들은 유익한 생활 정보를 주더라도 흘려듣고,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혹시 그때 그 말이 다혜의 자존심을 건든 걸까? 현미는 지금껏 다혜에게 속마음을 1%도 꺼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현미는 홍콩에 막 도착한 사람이 뭘 알겠나 싶은 생각에 ‘홍콩 생활 즐겨라, 잠시 있는 동안 재밌게 지내야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현미네 가정은 남편이 현지 회사에 취업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받던 대우보다 훨씬 높은 연봉으로 재취업에 성공해 자존심을 세운 듯했다. 하지만 집세와 학비 보조가 뚝 끊어졌다. 남편 월급으로 월세를 직접 내려니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집을 지원해 줄 때는 월세 35,000홍콩달러(490만 원, 2012년 환율 1홍콩달러=약 140원 기준)짜리 신축 아파트만 고집했었다. 하지만 남편의 직장이 바뀐 후 종아리가 퉁퉁 부를 정도로 많은 아파트를 찾아 헤맸다. 깨끗한 집을 찾으면 평수가 작고, 집이 마음에 들면 시내에서 멀어졌다. 형편에 딱 맞는 집을 25,000홍콩달러에 찾은 기쁨도 잠시였다. 남편 통장에 들어온 월급이 팍팍 줄어드는 게 실감 났다. 


국제학교 초등 과정 학비도 부담스러웠다. 1인당 매월 학비 12,000홍콩달러에 스쿨버스비, 점심값, 방과후 수업 등 필수 추가비용을 더하면 17,000홍콩달러가 들었다. 아이가 둘이니 34,000홍콩달러가 매달 빠져나갔다. 한국에서 흔한 피아노 개인지도를 시킨 것도 아니었다. 현미는 홍콩 정부가 학비 일부를 지원하는 DSS 학교(Direct Subsidy Scheme School)를 찾아보기도 했다. 국제학교 학비의 절반 수준이면서도 전통 있는 현지 학교도 많았다. 전 교육과정을 영어로 진행하는 학교들이었다. 하지만 입학 경쟁률이 높고 인터뷰 수준도 높았다. 입학을 보통 1년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들었다.


현미는 진짜 홍콩에 정착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변해갔다. 처음에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홍콩 정보를 찾았지만, 홍콩 말도 조금씩 배우고 최신 홍콩 영화도 다시 보며 홍콩인의 정서와 문화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문득 현미는 다혜에게 했던 말 중에 주재원들은 죽어도 집을 못 산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집세를 회사에서 대주니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는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주재원이 아닌 상태에서 다혜에게 했던 말이 너도 집을 못 살 거라는 식의 이야기가 된 건지 그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진 건지 괜히 마음에 걸렸다.


왜 다혜는 사람들 앞에서 집과 학교를 구하는 게 쉽다고 말했을까. 현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거만하게 말했지?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아, 원래 거만한 사람이었는데, 필요한 게 있을 때는 고개를 숙이다가 웬만큼 적응하고 나니 본성이 드러난 건가. 이제 적응을 다 했으니 고마웠던 일은 다 잊어버린 거구나. 현미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원래 거만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내가 필요 없으니 제 본성이 나온 거라고.


머리로는 억지로 이해했지만, 가슴은 여전히 화가 나고 답답했다. 어정쩡한 말로 시비를 걸면 도리어 눈 똥그랗게 쳐다보며 반박할 것 같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혼자 상상하니 짜증이 더해졌다.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던 현미는 와락 던져버리고 명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똑똑이가 카톡방에 올린 파일, 나한테 보내줄 수 있어? 내가 준 거 맞는지 확인해 보게."


명희가 5분 정도 뒤에 카톡을 보내왔다. 파일 이름은 '홍콩에서 집 구하기 타이쿠&사이완호.ppt'였다. 현미가 다혜에게 건넨 파일이름은 똑같았지만, 파일 형식이 달랐다. 현미는 엑셀 파일로 정리했고, 사진은 jpg 파일로 첨부해서 보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내가 준 엑셀 파일을 파워포인트로 만들었구나 싶었다. 현미가 준 아파트 정보랑 사진을 나란히 볼 수 있게 편집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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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심정으로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었다. 현미의 두 눈은 좁은 핸드폰 화면에 완전히 집중됐다.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핸드폰 아랫부분을 조심스레 위로 올렸다. 한 번 더 올리고 또 올리고 빠르게 밀어 올렸다. 아! 아니었다! 현미가 준 파일 내용이 아니었다. 현미는 전에 사이완호에서 2곳, 타이쿠싱에서 3곳의 아파트를 정리해서 다혜에게 보냈었다. 하지만 다혜가 만든 파워포인트 파일은 그것을 포함하고도 20곳이 넘는 아파트 정보가 들어있었다. 현미의 파일을 훨씬 업그레이드해서 만든 것이었다! 


(다음 주 ‘니가 사는 집 3’ 완결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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