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신문학상 수상작) 할머니가 계시던 내 유년의 풍경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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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신문학상 수상작) 할머니가 계시던 내 유년의 풍경 - 이주연

심사 위원장 김정진님의 심사평 이주연님의 [할머니가 계시던 내 유년풍경]은 세련되고 안정된 문장구사와 일상에 대한 세밀하고도 효과적인 묘사가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서술된 수필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겪은 음식에 대한 서술에서 자연스레 어릴 적부터 할머님을 통해 접한 요리로 이어지고 음식과 김장이며 오상치 이야기서껀 소풍과 체육대회 이야기까지 일상의 리얼리티를 충분히 형상화한 수작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할머니의 임종과 삶과 사랑을 대비시키는 솜씨도 뛰어난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계속 집필에 정진하신다면 훌륭한 텍스트를 집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나도 몇 달 후면 애기엄마가 됩니다. 결혼 6년 만에 겨우 가지게 된 귀한 첫아기. 처음 초음파 사진을 보았을 땐 그냥 조그마한 점 하나로 보이던 것이 콩알 만해지고 4개월 남짓 된 지금은 코도 생기고 심장도 쿵쿵 뛰고 손, 발로 버둥거리기까지 하는 버젓한 아기로 자라고 있습니다. 홍콩에 온지도 석 달이 다 되어가지만 계속되는 입덧 때문에 그 좋아하던 홍콩의 음식문화를 아직도 만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혼여행으로 홍콩을 방문했을 때는 아무 음식점엘 가도 다 맛이 있어서 음식기행인지 신혼여행인지 헷갈릴 정도였고 그 후에도 홍콩을 회상하면 로맨틱한 기억보다는 ‘그 때 그 요리’ 가 떠오르곤 했는데, 이 뱃속의 조그만 아이가 내 입맛과 그에 대한 기억까지도 바꿔버릴 만큼 힘이 세더군요. ‘그 때 그 요리’가 지금은 역하게만 느껴지니까요. 예전에는 남편의 직장 일로 뉴욕, 이스탄불, 프라하, 런던, 싱가포르 등지를 몇 년간 거치며 살았어도 한국음식은커녕 김치 한 젓가락 생각 안 날 정도로 식성에 있어서는 향수병이 없었습니다. 항상 그 나라 고유의 음식문화를 맛보고자 했고 집에서는 국적불명의 요리(?)를 창의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먹었지요. 특히 프라하에서는 코리안 레스토랑 하나 없었고 한국음식의 필수 재료인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멸치 등도 물론 구할 수 없었지만, 남편은 프라하에서 만들어 먹었던 음식들이 가장 맛있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우리음식 남의 음식 가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식당은 없어도 어딜 가나 중국, 일본식당은 흔하더군요. 만들어 먹는 것이 질릴 즈음이면 남편이 좋아하는 일식과 제가 좋아하는 중국식을 번갈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입덧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음식 맛만 찾게 되더니만 이제껏 생각지도 않았던 음식들이 상상만 해도 내 침샘을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찐 감자, 군고구마, 삶은 옥수수 같은 소박한 먹거리에 입맛이 당겼고, 더운 여름에 엄마가 종종 해 주시던 뜨거운 손칼국수며 매콤한 열무냉면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더군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것이라면 겨울날의 시원한 동치미입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동치미가 아니라 옛날 할머니께서 담가주시던 그 때 그 맛이 유년의 추억과 함께 내 기억의 상자에서 튀어나와 정말 오랜만에 지난 일을 더듬어 보게 되었습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의 단독 주택이었습니다. 반지하를 잇는 돌계단과 발코니가 있었기 때문에 철없던 우리 남매는 굳이 2층집이라고 우기고 다녔지만 실은 연탄 때는 지하실 위의 조그마한 양옥이었지요. 어린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 외에 우리가 집에서 즐겨 하던 놀이는 담벼락에 붙어 있는 시멘트 쓰레기통을 타고 잽싸게 담을 넘는 경찰놀이, 좁은 앞마당에서 기발하게 숨을 곳을 찾던 숨바꼭질, 그리고 장독대 위에서 보자기를 두르고 뛰어내리던 슈퍼맨놀이 등이었지요. 집안 부엌과 연결돼 있어 얘들이 뛰어내리기에는 꽤 높았던 장독대 위에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항아리들과 각종 단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 장독대는 할머니의 공간이었습니다. 항아리 속의 내용물들은 모두 할머니의 작품이었고 그것들을 매일마다 관리하고 챙기시던 모습은 마치 할머니가 그곳에 사시는 듯 했습니다. 따사로운 가을 볕에 빠알간 고추를 펼쳐 말리시곤 고추가루로 빻아 ‘고치장’(고추장의 할머니식 발음)을 담그셨고, 무를 잘게 썰어 꼭 목걸이처럼 무명실에 일일이 꿰고 무 말랭이용으로 주렁주렁 걸어 말리기도 하시고 어린 우리 눈에 도저히 음식으로 쓰일 수 없을 것 같은 희한한 것들, 예를 들어, 시래기, 육포, 말라 비틀어진 이름 모를 나물 같은 것들을 번갈아가며 선보이시던 곳도 장독대였습니다. 그러나 계집아이였어도 선머슴 같았던 나는 그런 할머니의 작업과정에 동참하기보다는 먹는 데만 주력했나 봅니다. 각종 항아리에 담긴 재료들과 장독대에 널려있던 이상한 것들이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봤어도 그것은 그저 할머니가 계시는 하나의 정다운 풍경으로 기억될 뿐, 그 과정을 찬찬히 재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간혹 내가 곁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면, ‘뭐던 배우려 허니 신통허지 뭐여’ 하시며 기특해 하셨는데 실은 배우려 했다기보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감에 조바심친 것이 8할은 됐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얌전하게 배웠더라면 지금 음식할 때마다 요리책을 뒤적일 필요는 없었겠지요. 김장철이 되면 온 가족이 달라붙어 했던 행사가 바로 배추 나르기였습니다. 시골서 트럭에다 싣고 온 100포기나 되는 배추를 계주선수가 바통을 넘겨주듯이 이어 나르는 것이었는데, 우리 일곱 식구 중 6명(막내동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제외시킴)이 손에 목장갑을 단단히 끼고 트럭에서부터 골인 지점인 부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마치 배추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날랐던 기억은 지금도 웃음을 자아냅니다. 추운 날씨에 코도 빨갛게 되고 손도 얼지만 김장의 개시를 알리는 배추 나르기는 어른과 아이가 배꼽 빠지게 웃으면서 할 수 있었던 일종의 놀이었습니다. 김장감들이 모두 갖춰지고 본격적으로 김장 담그기가 시작되면 김치 맛을 책임진 여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는데도 나는 그저 버무려진 김치 속을 맛볼 때에만 중요한 인물이 되곤 했지요. 잘 절여진 고소한 배춧잎에 감칠맛 있는 속을 싸서 먹는 그 맛이란, 상상을 하는 지금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맛난 것이었습니다. 싱그러운 굴의 향도 좋았고 김치를 담고 남은 잎들로 겉절이를 통깨랑 참기름을 버무려 뜨거운 밥과 같이 먹는 것도 기가 막혔지요. 할머니는 내가 매워하는 기색도 없이 ‘야, 맛있다’를 연발하며 자꾸 김치에 손을 대는 것을 보시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다 같이 담갔던 배추김치, 절무김치, 보쌈김치, 백김치와는 달리 동치미는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것이었는지 할머니 혼자 담그셨습니다. 내 키만한 큰 독에다 큼직큼직한 무와 각종 양념이 들어있는 망 주머니를 켜켜히 담아 절이고 나중에 국물을 부으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무와 국물이 시간이 갈수록 어우러지며 특유의 시원한 맛이 우러나는 신기한 작용은 망 속에 있는 재료와 겨울 땅의 정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요술을 부릴 동안을 지긋이 참고 나면 이윽고 살얼음을 걷어 내고 익은 동치미를 바가지로 퍼올릴 때가 옵니다. 할머니와 함께 뽀득뽀득 눈을 밟고 마당을 지나 동치미 독 속에 있는 눈처럼 하얀 무와 뽀얀 국물을 한 국자 퍼 소름이 돋아가며 그 쨍한 맛을 맛보던 그때가 내 유년시절 한겨울의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할머니가 만든 동치미 맛은 너무 달지도 짜지도 않고 담백하면서 톡 쏘는 맛이 있었는데 그 진가는 냉면을 해 먹을 때 드러났습니다. 원래 겨울음식인 냉면은 주로 육수에 동치미를 섞어 국물을 만드는데, 우리집에서 가끔 해 먹었던 냉면 맛은 할머니 동치미 국물 덕분에 참 별미였습니다. 그 맛을 찾아 홍콩에서도 몇 군데 다녀 보았지만 예전 그 맛에 비교할 순 없더군요. 맛이 얼추 비슷하더라도 할머니의 손 맛이 빠져있어 그런 것이겠지요. 냉면 좋아하는 식성은 이 때부터 생겼는지 누군가와 식사할 때만 되면 냉면 먹자고 해서 핀잔듣기 일쑤였는데, 천생연분으로 평양이 고향이신 시아버지 덕분에 냉면에 일가견이 있어 나보다 한술 더 뜨는 남편을 만나 외식할 때면 손발이 척척 맞으며 살고 있습니다. 늦여름이면 할머니는 굵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늙은 오이를 국수가락처럼 길게 채 썰어 매콤 새콤하게 무쳐주셨습니다. 이 여름별미를 할머니는 언제나 ‘오상치’ 라고 하셔서 우리 남매는 어딜 가나 오상치, 오상치 했는데 실은 오이생채를 그렇게 발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도 할머니의 독특한 명칭사례로 기억나는 것은 ‘드라마깽’과 ‘뒤질랜드’가 있습니다. 당시 TV에 방영되던 ‘드라마게임’이란 것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언제나 ‘드라마깽 본다’고 하셔서 우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깡패로 한동안 착각했었지요. 또한 어린이 놀이동산 디즈니랜드를 무시무시한 ‘뒤질(!)랜드’로 탈바꿈 시키시는 바람에 한참을 웃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비록 중학교만 나오시고 평생 살림만 하셨던 분이었지만 할머니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였습니다. 돌 맷돌에 구식 재봉틀, 꽃무늬가 있는 茶食 찍는 목판, 놋식기 등은 시골서 할머니가 지니고 올라오신 골동품들 적어도 어린 우리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었는데 할머니가 실제로 이 물건들을 요긴하게 쓰시는 것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고 몇몇 장면은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구식 재봉틀로 내 한복을 직접 만들어 주실 때나 송화가루, 콩가루 등으로 만든 갖가지 반죽이 예쁜 꽃 모양 다식으로 찍혀 나올 때는 할머니가 예술가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까요. 아주 어릴 적부터 내가 보아온 할머니는 그야말로 꼬부랑 할머니였습니다. 당시 환갑을 조금 지났을 뿐인 연세이셨을 텐데도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인 양 깊게 패인 주름살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골을 지어 대바늘을 숨겨 놓으면 못 찾을 것 같았습니다. 어린 맘에도 할머니의 그 주름살이 안쓰러웠는지 할머니를 위로한답시고 나는 종종 ‘다리미로 밀면 펴질 거에요. 할머니, 제가 크면 주름살 다 펴드릴게요’라고 장담했지요. 시도를 안 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지만요.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셨던 까닭에 소풍이며 체육대회 때마다 할머니가 학부모님으로 오셨지만 나는 그런 꼬부랑한 우리 할머니가 부끄럽진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집에서 보낸 시간의 연장일 뿐이었죠. 음식하시는 할머니 말고도 팔베개를 하고 옛날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시던 할머니, 등교하기 전 매일 머리를 빗겨주시고 예쁘게 묶어주시던 할머니, 흰머리를 뽑아드릴 때마다 머리카락 당 백원씩 주시던 할머니, 내가 아플 때마다 듣도 보도 못한 민간요법을 동원하여 낫게 하시던 요술 손 할머니, 그리고 집안사정으로 할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 아파트 복도에서 우리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시던 우리 할머니가 학교에 엄마 대신 오신 것이 뭐가 이상했겠습니까. 그러나 머리가 커서는 학교공부다 뭐다 해서 할머니 댁에 놀러 가는 것도 뜸했고 결혼하고 나서는 서툰 살림하랴 대학원 공부하랴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하실 때에도 내 문제에 치이고 논문에 매달려 제대로 찾아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틈만 나면 김치와 밑반찬, 갑사 천을 알록달록 예쁘게 이어 붙인 반찬덮개 등을 전해주시곤 했는데, 당시 나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그리 많았는지 그런 할머니의 정성이 그다지 절실하게 와 닿지 않았더랬습니다. 3년 전 할머니의 장례식 날 참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나는 우리 일가 친척들이 꽤 많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분들의 한결 같은 말씀이, 할머니는 서울에 올라오시기 전 제사 많고 체면치레 잦은 시골농가의 맏며느리로 위로는 시부모님, 아래로는 수많은 시동생들, 그 식구들, 당신의 자녀들, 일꾼과 그 가족들까지 다 챙기시고 싸움이나 반목이 있을 때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셨답니다. 그 많은 식솔들을 섬기며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얼마만큼의 희생과 지혜가 필요했을까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단 두 식구 살아가면서 엮는 관계도 가끔씩 힘겨워 했던 부족한 내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문상오신 분들의 말씀을 곁에서 듣노라니, 모두가 각자 맘속에 들어있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와 함께한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나 뿐만 아니라 이분들에게도 역시 소중했던 거지요. 할머니의 조카뻘 되시는 어떤 아저씨는 술기운 탓인지 몰라도 한참을 섧게 울다 가셨는데 어려웠던 고학생 시절 주린 배를 안고 불쑥 들르면 할머니가 그렇게 안쓰러워 하시며 밥상을 정성껏 차려주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꿈 많았던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지금의 여전히 고단한 삶이 서러움을 더욱 북 돋았나 봅니다. 할머니에 대한 일들을 추억하다 보니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왜 그리 할머니가 해주시던 모든 음식들이 다 맛있게 느껴졌던가를. 요리책 여러 권을 사서 해먹어 보아도 그 간단한 동치미에 예전 맛이 안 나는 이유를, 맛 집을 아무리 찾아 다녀도 맘 한구석이 여전히 허전한지를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 TV에는, 신혼부부인 듯 보이는 커플이 식탁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데 신랑이 속으로 ‘아, 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다’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광고가 나옵니다. 그 신부가 아무리 시어머니께 비법을 전수 받는다 해도 남편의 그런 그리움을 온전히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맛은 재현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추억과 그 시절은 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면서, 그 동안의 무심함에 대한 자책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뵐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 그리고 나를 아기 때부터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 어린 손녀로만 한결같이 사랑해주시던 그 품이 영영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배고파 흙투성이가 되어 집에 뛰어들어가 책가방 내던지고 제일 먼저 찾았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계시던 자리에는 내 어린시절의 무지개도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안계신 지금은 그 무지개도 시간과 함께 가고 없습니다. 언젠가 뱃속의 내 아기도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발길질을 시작하겠지요. 이 아이가 세상에 나와 지낼 유년시절을 할머니께서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내가 예쁘고 행복하게 꾸며주어야 할 텐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집니다. 과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될까요.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도 안다는 말이 지금 나에겐 큰 격려가 됩니다. 나야말로 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왔으니까요. 결혼한지 한참 되어도 아이소식이 없다고 한걱정을 하시던 할머니. 지금 살아계셨다면 참 기뻐하셨을 이 아이의 존재가 바쁜 세상일에 까맣게 잊어가고만 있던 것들을 아주 선명하게 일깨워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선물그분이 계시던 내 유년의 풍경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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