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전기범 씨 “공짜 점심은 없다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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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전기범 씨 “공짜 점심은 없다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2편)

- 마약사건 후 7개월간 말못한 뒷 이야기 2편

 

 

 


구치소 생활은 견딜만 했는지

구치소에서 식사는 매우 힘든 수준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입금으로 사과와 봉지라면, 탈지분유 등으로 버텼다. 하루에 사과 3개로 버틴 날도 있었다. 2주동안은 설사를 계속했다. 4주만에 10킬로가 빠졌다. 보석으로 나와서도 한달 정도는 밥이 안 넘어 갔다. 원래 고기를 좋아해서 몇인 분씩 즐기는데, 막상 먹으려고 하니 장이 줄었는지 먹을 수가 없었다. 한달 정도 지나니까 햄버거도 먹을 수 있겠더라.

 

구치소에서 잊혀지지 않는 3명이 있다. 대만 흑사회, 홍콩인 할아버지, 광저우 농아 친구. 대만 흑사회 친구는 호주로 마약을 밀매하다 잡혔다. 내가 억울하게 들어온 것을 알게되자, 앞으로의 예상 진행상황을 미리 말해주며 안심시켜 줬다. 홍콩 할아버지는 내가 홍콩에서 10여년 전에 거주했던 북부 아파트에서 왔다며, 본인 사입금 중 무려 백위안 이상을 흔쾌히 쓰시고 고향 어르신처럼 보살펴 주셨다. 농아 친구는 중국인들과 사이에서 수화로 통역해주었다. 중국어 초보인 나에게 신기하게도 몸짓으로 하는 수화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보석 후 어떻게 생활했나

광저우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심천에 가면 홍콩 하늘이 보일테고,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다. 변두리 로컬 민박집에서 완전히 ‘방콕’ 생활을 했다. 밥도 안 먹고 인터넷과 책만 보고 지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서야 산보겸 한끼 식사를 하러 나갔다. 보석비용, 식대, 월세, 생활비, 변호사 면담 등 보이지 않게 돈이 자꾸 들었다. 통장이 결국 바닥을 찍고 카드대출로 썼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홍콩인) 아내도 자주 올 수 없었다. 잠시 무역일을 해보려했지만 진행되진 않았다. 아는 분을 통해 잠시 수험생에게 영어 과외도 했다.

 

 

야구동우회와 공관에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데 실감을 했는지

한국 외교부에서 분명히 힘을 쓴 것은 맞는 것 같다. 한국 외교부, 북경 대사관, 광저우 영사관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아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구치소에서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예상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보석이 진행됐고, 무죄선고도 빨랐다.

 

야구회원들도 번갈아 가며 한달에 한번 이상 광저우와 심천까지 와주었다. 일본팀들도 심천으로 찾아와 주었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로가 되고 기억에 남는다.

 

 

더 일찍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던데

외교부와 광저우 총영사관의 도움으로 4월경에 홍콩으로 돌아올 뻔 했다. 중국 공안으로부터 보석허가를 받고 홍콩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비자도 만료되고(비자가 만료되면 벌금을 물거나 장기 불법체류시  추방당할 수 있음), 아무런 확인 문서도 없었다.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서 (자기들에게) 전화하라고만 했다. 북경의 공안본부, 광저우 공안, 심천 국경 세 군데에서 확실하게 행정지원을 못했고 실무자들간에 원활하지 못한 것 같았다. 광저우 공안으로부터 허가서류를 받아 들고도 내내 한 번 와보지 못하고… 결국 8월말에서야 홍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화 ‘집으로’를 보면 해외에서 단순 보따리장수가 마약범으로 구속된 상황이 그려진다. 실제로 겪어보니 어떠했나?

영화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광저우 총영사관에서) 대체적으로 우리 입장을 많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거주지가 3개 도시에 14명이나 되는 회원들이어서 그런지 매번 미팅 때마다 떨떠름하게 헤어졌다. 한 영사는 이야기만 꺼내면 “다 알고 있고, 지금 진행하고 있고…” 이런 식이었다. 대응기밀 등의 이유로 의사소통이 제개로 안되어 결국 실망하게 됐다.

 

아무리 중국이라고 하더라도 불투명하게 행정이 진행된 것이 힘든 부분이었다. 이해는 간다. 그분들도 본인들이 다 하는 일이 아니니까. 아마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광저우를 나온 것 같은데 마지막날 광저우 총영사관에서 가서 담당 영사님와 부총영사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고 왔다. 그동안의 의사소통 미숙과 오해는 차치하고, 그분들의 도움에 진정으로 고마웠다고.

 

또 홍콩에서 12년간 영주권을 얻어 살고 있었지만 홍콩 총영사관의 협조나 관심이 아쉬웠다… 4월에 홍콩으로 돌아올 기회가 생겼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연락이 와서 도와주겠다는 말에 더 실망감 느꼈다. 나중에 느낀 것은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우리 홍콩 회원 3명이 서로간에는 물론 가족들과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된 부분도 컸다.

 

 

국경을 넘어 홍콩 집에 돌아왔을 때 느낌은

이미 광저우에서 보석 생활을 몇개월 지냈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사이에 집도 이사해서 8개월간 창고에 있던 이사짐을 뒤늦게 받았는데, 박스를 열면서 내가 쓰던 일상용품들 보는 순간 울컥했다. ‘아, 평범한 내 일상, 내 삶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다.

 

 

귀환 후 먼저 누구와 만났는지

일본야구팀, 우리 한인팀과 환영회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 위로를 받았다. 정말 고마웠다. (전 씨는 한인팀이 생기기 전부터 일본팀과 홍콩팀, 심천팀에서도 활동했다.)

 

 

함께 고생했던 다른 회원들은?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어렵다. 내가 감독이고, 형이고, 이번 대회 홍콩쪽 책임자고. 여러가지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겁다. 사건 이후로 (두 회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나를 믿고 대회에 참석했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떠나 동생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지인이나 주위 시선이 쉽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보면 사람에 대해서는 큰 소득이다. 지인의 80% 정도, 내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위로해주고 울어주었다. 이번 기회에 정말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다. 가족애도 절실히 느꼈다.

 

몇몇 사람들은 좀 변하더라. SNS에 나의 상황을 가끔씩 올리곤 했었는데, 짧은 댓글 하나가 내 감정을 쥐락펴락하기도 했다.

 

특별히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체면치레로 남긴 댓글은 더 서운했다. 이미 7~8개월동안 구치소와 보석상태로 지내면서 도를 닦고 나왔다. 감정은 없다. 하지만 (답답했던 속마음을) 이렇게 변을 통해 한번은 풀고 싶었다.

 

 

현재의 심정은

변명같지만, (그들은) 굉장히 교묘했다. 공짜 점심은 없는 건데 그 부분을 간과했다. (거의 무료로) 호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덥석 물은거. 실수이자 교훈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는 12년 전에 맨손으로, 총각으로 홍콩에 왔을 때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과의 신용, 업무 이력이 쌓인 거 외에는 금전적으로 모두 잃었다. 12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직장도 다시 구하고 새로 시작해야한다. 차근차근 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수요저널이 사건 초기부터 교민지로서 우리 입장을 충실히 들어주고 기사화 해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인터뷰 정리 손정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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