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은 홍콩에 온지 조금 되갑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사계절을 체험하니 이제야 홍콩에 사는 기분이 실감납니다.
처음 남편에게서 이곳으로 발령소식을 들었을 땐, 들떠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홍콩에서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했습니다. 홍콩 주재원 생활을 했던 가까운 지인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었을 땐 좋은 면이 많이 들렸습니다.
특히 여자와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된다고요. 한국 직장만큼 회식자리가 많지 않고 동문회나 여기저기 모임도 없어서 귀가도 일찍 한다고요. 그리고 시댁이나 친인척도 없으니 마음도 편하고요. 또 가정부까지 쓰니 육체적으로 정말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에 홍콩 발령을 제가 더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홍콩에 와서 저는 아이와 함께 홍콩 정착을 위해 학교등록과 학원 등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홍콩생활 처음에는 남편이 많이 도와줬지만 얼마 지나서는 제가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학교 때 배운 영어는 처참한 수준이고, 광동어는 엄두도 안냈습니다. 뭐 그래도 아줌마 정신으로 잘 지냈습니다. 여기 오기전 이미 들었던 홍콩생활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그말이 그말이었구나’하면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저희 남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서야 속깊은 고민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콩에 한국사람이 적다보니 저희 남편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종도, 나이도 생략합니다.)
남편은 주말마다 산행을 갔습니다.
홍콩의 트레일이 워낙 좋다고 하니 회사 사람들과 좋아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일년에 한 두번 정도 밖에 가질 않았는데 홍콩서는 거의 매주 갔으니까요.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사치스런 취미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등산을 같이 가던 사람이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등산을 안가고 가족이랑 주말을 보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혼자라도 계속 가겠다는 겁니다. 왜 가냐고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짜증내면서 뱉었습니다.
“산이라도 안가면 미칠 것 같애.”
결혼 전부터 남편은 회사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몇일 지나면 괜찮다고 말하던 남편인데, 한국서도 매일 야근해도 회사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던 사람인데 미칠 것 같다니요? 아니면 저에게 불만이 있었는지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홍콩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한 우리 가족은 남편의 폭탄발언 같은 한마디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부랴부랴 편의점 뛰어가서 맥주와 참치캔을 안주삼아 사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편과 거실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겁먹은 제 얼굴을 보면서 남편은 조용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홍콩에 와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자세한 내용은 말하기 어렵지만 한국 본사에서 기대 실적을 자꾸 높여 부담이 엄청나다고 했습니다. 순간 얼마전 신문에서 본 금융계 젊은이의 자살사건이 떠 올랐습니다.
우리 남편이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높은 임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직급이 되면 홍콩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남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겁이 납니다. 저는 남편의 속도 모르고 홍콩의 재미있는 얘기만 한국 친지들에게 전했습니다. 저와 아이 얘기만 자랑했을 뿐, 남편의 이야기는 거의 한 적이 없네요. 그 흔한 카스에도 남편 사진이 별로 없는 걸 알았을 때 정말 남편에게 미안했습니다.
오늘도 남편은 혼자 산행을 갑니다.
새로운 산에 갑니다.
오늘은 조금 멀리 간다고 했습니다. 제가 싸준 주먹밥과 커피를 가방에 담고 조용히 나갔습니다. 보내고 나니 문득 나도 따라 나설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말벗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다음주에는 꼭 저도 함께 나가렵니다.
‘산으로 간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 이영은(가명, 구룡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