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인터뷰]홍콩 한인 장자회 김대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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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인터뷰]홍콩 한인 장자회 김대선 회장

[[1[[“자살하려고 구룡 앞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했지만, 그 고비를 넘기자…” 한인 장자회 김대선 회장(79세)이 홍콩에 온 것은 지난 1978년, 유신말기였다. 베트남 미군 부대의 군속으로 근무했던 손 아래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홍콩에 정착하게 되자, 그도 그 뒤를 따라 홍콩으로 왔다. 법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상거래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먼저 자리잡은 동생의 상점(신한 백화점)에서 1년 남짓, 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부친이 타계하신 터라 집안 대소사는 장자(長子)인 그의 몫이었고, 그러다보니 도와주며 일을 배운다고 했지만 상점 관리의 주도권은 어느새 그가 좌우하게 되었다. 형제간에는 별 탈이 없었으나 이는 ‘여자들의 싸움’으로 이어졌고 그는 곧 자의반 타의반 독립을 선언해야 했다. 공직생활 중 한푼두푼 모아 장만한 신림동 법원주택을 처분하고, 그간 모은 돈을 다 긁어봤지만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엔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간신히 ‘롯데 백화점’이라는 상호로 상점을 냈으나 물건을 갖출 돈이 없었다. “동생 일을 도울 당시 알게된 거래처를 다니며 사정하니까 홍콩 사람들이 3개월 어음을 받고 물건을 내줬어요. 그 덕에 간신히 시작을 한 거죠. 그런데 갑자기 비자가 끊긴 거에요. 대사관에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지만 방법이 없다고 일단 비자가 나올 때까지 한국에 가 있으래요. 집까지 팔아서 가게를 열었는데, 바로 한국으로 되돌아가게 됐으니 눈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오죽하면 돌아간 그 분(그는 10년전 고인이 된 부인을 ‘그 분’이라고 호칭했다)이 나보고 같이 죽자고 하더라고. 그때 구룡 앞바다 물속에까지 같이 들어갔었어요. 직장은 그만뒀고, 전 재산은 다 여기 퍼부었는데 모두 날리게 생겼으니 절망할 만도 했지. 세상이 답답하고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그때 우리 딸 애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그 아래 둘은 아직 초등학생일 때니까, 내가 그랬죠. 우리가 죽으면 애들은 어떻게 하냐?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살자고.” 천운일까, 그의 딱한 사정을 들은 거래처 홍콩사람이 비자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 ‘롯데 백화점’을 자신의 회사 자회사로 등재하면 비자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비자 문제를 넘어섰다. 그리고 딱 반 년 후인 1981년 8월 1일, 제5공화국은 여권법시행규칙을 개정, 여권 발급 기준과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관용 또는 상용 여권만 허가되다 일반 여권이 발급되자 봇물 터지듯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나왔다. “당시 홍콩 물가가 한국의 1/3밖에 안되던 때였어요. 말 그대로 갈퀴로 돈을 긁었죠.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했는데 하루에 100명, 150명씩 몰려왔어요. 집에 올 때 쌀자루 같은 데다 돈을 한가득 담아가지고 왔지.” 인터뷰 자리에 동석했던 김재윤 장자회 고문은 “김 회장보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있지만 김회장처럼 말년까지 관리를 잘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 비결에 대해 묻자 김대선 회장은 “그저 부동산을 샀을 뿐이다. 부동산은 10년이면 꼭 세 배씩 올랐다”고 답했다. 그는 먼저 집을 샀고, 가게는 내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침사초이 중심가에 상가를 샀다. 은퇴 후 그 상가는 임대를 줘 현재 C&C 모텔이 그 자리에 운영 중이다. “두고 자살하려고 했던 때도 있었는데, 자식 셋을 다 국제학교 가르쳐서 큰 딸은 한국으로 대학을 보냈고 밑에 아들 둘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그 분(부인)이 얼마나 알뜰했는지 돈을 한 푼도 허툴게 쓰지 않았어. 암으로 10년이나 투병생활을 하다가 지난 2000년에 세상을 떴는데,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같이 좋은 데 여행도 가고, 좋은 호텔에서 잠도 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여행이라고는 마카오에 딱 한 번 같이 간게 다야. 그게 내 가슴에 못이 되고 말았어요.” 그의 모친은 올해 105세로 현재 미국에 있는 형제들이 모시고 있다. 원래 홍콩에서 그가 모셨으나, 돌아가신 부인이 죽기 한달 반쯤 갑자기 “내가 몸이 안좋으니 미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모시게 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시자마자 부인은 곧 세상을 떴다고 했다. 홍콩생활 33년 째, 이제 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나 죽으면 뼈는 한국에 묻을 거라고 했다. 고인이 된 부인의 유해도 한국으로 모셨다고.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그는 이미 현업에서는 모두 은퇴한 상태다. 다만 지난 2003년 7월, 장자회가 세워진 이후 7년 째 한인 장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장자회 정관 위반이지만 그의 ‘장기독재’는 올해까지 연장되고 말았다. 그는 ‘올해는 그만두고 싶은데…’하고 말했으나 동석한 김재윤 고문은 ‘일단 했으니 그냥 10년 하시오’하고 타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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