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세계 최고 용병 구르카의 홍콩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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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세계 최고 용병 구르카의 홍콩 현대사

용맹함으로 맹위를 떨치다! 최강의 용병 구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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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구르카(Gurkha) 용병을 알고 있는가? 전세계에서 용맹을 떨치며 용병으로 활약한 군인들이다. 이들은 네팔 중서부 산악 지대에 사는 몽골계 소수 부족이니, 징기스탄 후예의 DNA를 장착한 것 같다. 구르카들은 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쿠크리(Khukri)를 들고 적이 누구든 두려움 없이 맞섰다. 쿠크리는 끝이 구부러진 단검이다.  

 

영국의 침공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군인들도 구르카였다. 당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사 항전을 벌인 구르카들은 영국군에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영국은 구르카들을 용병으로 고용한다. 

 

구르카들을 유명하게 만든 몇몇 일화들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혼자서 일본군 10명을 죽이고 두 개의 벙커를 탈환하거나, 오른손을 잃은 상태에서 왼손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200명의 적을 막아낸 이야기 등이 그렇다.  

 

가장 전설적인 사건은 인도에서 발생했다. 비슈누 슈레스카라는 구르카 퇴역 군인이 기차 안에서 한 여자를 강간하려는 40명의 무장 강도와 싸워 물리친 에피소드이다.  2010년 9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매체에 의하면 강도 3명이 참살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백병전의 1인자인 구르카들은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 등에도 참전했으며 한국 전쟁에서도 맹위를 떨친 바 있다. 이런 구르카들은 홍콩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홍콩 치안을 담당한 구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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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들은 전쟁 군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치안 담당의 역할도 하였다. 홍콩에 발을 디딘 것은 1948년이다. 인도가 막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였다. 구르카들은 영국군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인도에서 활동한 구르카들은 영국 군대로 편입되거나 말레이시아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제 26 구르카 여단은 홍콩에 파견된다. 이들은 화이트필드 군영(지금의 구룡공원)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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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구르카 부대는 홍콩에서 교대 주둔을 하였다. 당시 홍콩의 구르카 병역에는 약 8,000~10,000 명이 복무를 하였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항구를 순찰하며 불법 이민자의 입국을 막는 일이었다. 자연 재해 발생시에는 인도적 구조 활동을 하며 홍콩 사회 안정에 기여하였다. 일본 점령 기간에 설치된 폭탄 제거 작업이라는 위험한 업무에도 투입되었다. 이러한 용맹함에 융통성까지 갖추면서 구르카들은 홍콩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구르카군들이 처음으로 동원된 것은 1966년 4월 4일부터 8일까지 벌어진 스타페리 폭동 사건 때였다. 당시에는 바로 옆 중국대륙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대륙의 혼란은 인근 홍콩에까지 번지려 하였다. 스타페리 폭동은 요금 인상에 반대해 발생했는데, 실은 식민 통치에 저항하기 위한 소요 사태였다. 소총과 총검으로 무장한 구르카족 병사들은 스타페리 부두 주변 지역을 순찰하고 통금 시간을 엄수하였다. 

 

구르카는 또한 1967년 샤타우콕 사건으로 알려진 폭동 당시 치명적인 교전을 진압하는 데도 동원되었다. 참고로 샤타우콕은 비석 하나로 중국대륙과 홍콩간의 국경을 나누어 놓은 곳이다. 이 사건에서 중국 인민 민병대의 지원을 받은 수백 명의 시위대가 국경을 넘어 경찰서를 점거하였다. 이 폭동으로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11명은 부상을 입었다. 이때 제 10구르카 소총연대 소속 약 5백 명의 군인들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약 10 시간 만에 포위 공격을 끝냈다.  

 

구르카 신분의 한 군인은 국경을 넘어 중국 관리들과의 협상 업무를 위임 받기도 하였다. 잡혀간 영국군을 석방시키기 위한 협상이었다. 여러 가지 시도가 실패한 후 취해진 조치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쟁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홍콩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구르카의 후예인 아모드 라이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 때 한 말이다. 그는 구르카족의 홍콩 사회 공헌을 알리는 단체를 설립하여 활동 중이다. 


버림받은 구르카, 그리고 후예들

 

 

이렇게 구르카족은 중국 문화대혁명 불길에서 파생된 혼란과 위협이 홍콩에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중국의 불법 이민자와 베트남 보트피플로 인한 전례 없는 규모의 인구 유입 사태가 발생한다. 정부는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대대를 창설한다. 구르카군은 홍콩의 모든 국경 지점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난민 수용소 건설 및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역할은 홍콩의 반환과 함께 막을 내린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귀속된 후 구르카들은 버림받은 신세가 된다. 많은 이들이 네팔로 돌아가거나 영국으로 이민길에 올랐다. 홍콩에 남은 구르카와 그의 가족들은 교육 문제로 떠나지 못했다. 자녀들이 홍콩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홍콩에 거주하는 네팔인들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인원은 모두 구르카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홍콩에서는 거의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된 구르카들. 남아 있는 이들의 후예들은 그들의 조상이 지켜왔던 삶의 터전에 뿌리를 내린 채 생활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네팔인들을 만난다면 다음의 질문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구르카의 후손입니까?” 



<참고 자료>

‘세계 최강 구르카 용병’, 한국경제

‘Hong Kong stories: How Nepalese Gurkha soldiers helped shape the history of our city’, SCMP

‘Gurkha’s history of service to Hong Kong is being forgotton’, Asia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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