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총리의 애국심
밤이 으슥하였다. 周恩來총리는 키신저의 숙소를 찾았다. 파키스탄에서 비밀리 北京으로 날라 온 키신저는 周총리와의 회담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모두를 포기하고 파키스탄으로 귀환코저 했다.
그 때 周총리가 나타난 것이다. 周총리는 자신이 癌선고를 받고 있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극비사항을 틀어 놓았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과 교섭하는 것이 중미 양국에 조금이라도 유리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周총리의 간절한 애국심이 키신저를 움직여 1972년 닉슨의 방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周총리의 젊은 시절 일본을 잠깐 유학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귀국 후 5.4운동의 주역으로 애국활동을 한 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周恩來는 어린시절 양부를 따라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양부의 근무지가 천진으로 옮기게 됨으로써 그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는天津의 南開중학에 입학하여 전교 최우수의 성적을 낼 정도로 명석한 두뇌와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
남개중학에는 설립자 嚴修가 출연한 嚴修장학금이 있었다. 周恩來는 이 장학금으로 南開중학을 졸업하는 1917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周恩來와 비오는 아라시야마(雨中嵐山) 일본의 東京에 도착한 그는 明治대학 정치경제학과에 다니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최강국 淸國을 꺾음으로써 중국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일본에 대한 호기심과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서양문명을 가져다 주는 서쪽 바다(西洋)에 비유하여 근대 문화를 가져다 주는 동쪽 바다(東洋)로 불렀다.
일본에서 고안해 만든 인력거를 동양차로 불렀고 한동안 일본이라는 지명대신 동양이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승리의 대가로 할양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등 유럽국가의 간섭으로 반환하게 되자 와신상담 10년의 전쟁준비를 거쳐 다시 유럽의 강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때에도 아시아의 많은 청년들은 일본을 배우자는 열풍이 일었다. 그러나 旭日昇天의 일본은 일차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오히려 脫亞入毆의 노선으로 아시아 문화를 유럽 사람들의 눈높이로 보고 아시아를 무시하였다.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을 합병하고 중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침략기세가 등등한 일본에 크게 실망하여 일본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중국의 애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항일 귀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周恩來도 일본의 야욕에 실망하던 중 모교 南開중학에 대학부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귀국선을 타기 위해 고베(神戶)로 가는 길에 교토(京都)에 들려 유명한 아라시 야마(嵐山)로 향했다.
1919년 벛꽃이 만개한 4월5일이었다. 교토의 서남쪽에 있는 嵐山은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귀족들의 별장지가 많았던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웠다.
주은래가 찾아간 嵐山에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안개로 소나무와 벚꽃이 섞여 시계가 흐릿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줄기의 광명이 구름사이로 비쳐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인간만사가 생각할수록 비안개 속처럼 모호하지만 그 모호속에서 한 점의 빛이 볼수록 아름다운 것을!
“潚潚雨霧水蒙濃
一線光穿雲出愈見嬌姸
人間的萬象眞理愈來愈模糊,
模糊中偶然見着一点光明眞愈見嬌姸”
청년 周恩來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불안과 모호속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嵐山에서 쏟아져 나온 일점 광명이 자신의 앞날을 밝게 인도하는 것으로 느꼈다.
覺悟社활동
周恩來는 天津으로 귀국 南開대학의 1기생으로 입학하고 곧이어 항일 5.4 운동에 참여하였고 1919. 9월에는 친우들과 뜻을 모아 覺悟社(Awakening Society)를 결성하였다.
그 중에는 당시 15세의 鄧穎超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25명의 회원을 가진 覺悟社는 5.4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상품 보이콧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당시 北京의 군벌정부는 일본이 일차세계대전의 전승국 위치에서 산동반도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권익을 중국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지원을 노리고 오히려 일본을 옹호하고 나섰다.
1920.1월 군벌정부는 일본의 압력을 받아 일제상품 보이콧 운동을 하고있는 覺悟社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周恩來는 天津에서 체포된 각오사 회원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다가 동료와 함께 체포된다. 그후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경미한 처벌로 곧바로 풀려난다.
그는 이미 南開대학에서 제적된 상태라 대학으로 돌아 가지 않고 유럽유학을 결심한다.
그는 재정지원을 위해 勤工儉學(work-study)프로그램에 가입하고 부족분은 嚴修장학금과 天津의 한 신문사의 유럽특파원 임용으로 해결한다.
주은래는 覺悟社를 鄧潁超에게 맡기고 출국함으로써 두 사람은 그 후 중국과 프랑스를 잇는 사랑을 키우고 한평생을 같은 길로 나가는 혁명동지가 되었다.
1920. 11.7 주은래는 勤工儉學의 중국청년 196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 인도양을 돌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한다. 1920년 12.13 일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유주열(yuzuyoul@hotmail.com) 전 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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