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나고야시는 아무것도 남지않은 허허벌판이 되었다. 1,500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那古野의 지명이 어울리듯 "저 쓸쓸한 벌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아름다웠다는 나고야성도 다 타버리고 明治, 大正를 거쳐 지어진 자랑스러웠던 서양식 벽돌건물도 모두 "야케노하라"(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나고야 시민들은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제조업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를 이루어냈었다. 일본제조업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모두 나고야 지역에 몰려있다. 토요타자동차, 노리타케 양식기, 린나이 가스기구, 브라더 미싱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러한 모노즈쿠리 전통이란 쉽게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나고야가 언제부터 일본제조업의 중심이 되었을까. 400년전 德川家康가 天下를 통일하고 나고야에 豊臣秀吉의 오오사카성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城을 쌓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6세기는 일본에서 전국시대로 통하는 세기이다. 정말 "백년전쟁"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일본 전국토는 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中國의 戰國時代와 같은 양상의 전국시대가 일본에도 온 것이다. 지리적으로 대륙이나 반도로부터 바다에 의해 떨어져있어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은 외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외침이 없다보니 武人의 역할은 일본열도의 개척이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에 군대가 앞장선 것처럼 일본도 동북부 개척에 항상 武士가 앞장섰다. 미국이 인디언을 먼저 정복한 후 settler가 자리잡듯 일본도 "에조(蝦夷)"라는 원주민을 정복해야했다. 지금의 일본 중부지방 이북에 살고있던 "에조"라는 오랑캐(夷)를 더 북쪽, 지금의 동북지역, 또는 北海道의 산악지대로 쫓아 올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담당하는 것이 주로 武士들의 일이고 귀족은 꽃이나 감상하고 詩만 짓고 있으면 되었다. 일본은 중국처럼 대장군이 天子가 된 예가 없어서인지 군사관계는 무사들이 맡았고 그들은 문화를 잘 모르는 것으로 무시되기도 하였다. 무사들이 변방을 지켜주는 야경꾼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기 전까지는 무사들의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적의 침입이 없어 선진무기를 접할 수 없었다. 바다가 있으므로 바다 자체가 훌륭한 자연적인 장벽역할을 하였다. 中國은 만리장성을 쌓아서 변방을 막았지만 일본은 바다 자체가 만리장성이던 셈이다. 따라서 싸움은 東北지방에 사는 미련한 원주민, "에조"가 상대였다. 그렇지만 무사들은 동북개척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천황은 무사들 중에 가장 우수한 사람에게 "에조" 정복의 이름을 붙여 征夷大將軍의 직함을 준다. 일본말로 "세이다이쇼군"이다. 줄여서 쇼군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논픽션 작가 James Clavell이 지어서 유명한 "Shogun"이 바로 이것으로 일반적인 장군의 의미인 general하고는 틀리다. 요즘으로 말하면 군총사령관이다.
카마쿠라 幕府
대개 10세기는 일본이 한반도로부터의 관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는 시기이다.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 50년간 스스로 재통일에 바빴고, 고려가 재통일에 성공했지만 국가의 기틀 잡기에 분주하여 일본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때다. 또한 고려는 국가기틀을 잡기가 바쁘게 북쪽으로부터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공을 받았다. 당시 중국은 唐에 이어 전국을 통일한 宋도 북쪽의 소수민족을 이기지 못하고 남쪽 항주로 쫓겨나는 신세였다.
당시 북쪽의 소수민족으로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있었다. 宋이 달아난 지역에 각각 "遼"와 "金"을 세운다. 두 나라가 모두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도 북쪽의 강국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또다른 소수민족 몽골이 나타나 여타 소수민족을 평정하고 남송마저 정복, 중국전체를 통일한다. 고려도 100년간 몽골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된다. 어쨌든 고려조를 통틀어 일본과의 관계는 미미했다. 일본은 몽골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 대륙과 한반도의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고 동북부 개척에 몰두하였다. 天皇의 명령으로 무사의 무리를 이끌고 "세이다이쇼군"은 동북쪽으로 진출해 갔다. 12세기 그들이 "에조"와 맞대고 있었던 곳은 지금의 토쿄지역인 관동평야 입구 "카마쿠라"(鎌倉)였다. 카마쿠라에 幕府(군사령부)를 개설한 사람은 다이쇼군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였다.
그는 이른바 源平戰을 통해 당시 실력자인 平씨의 우두머리 平淸盛 세력을 제압, 권력을 잡고 일본최초의 무인정권 카마쿠라 幕府를 개설하였다. 天皇도 다이쇼군의 눈치보기에 바빴다. 힘의 중심인 카마쿠라와 정치와 文化의 중심인 京都를 연결하는 것은 東海道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동해안(태평양연안)의 古道이다. 카마쿠라의 다이쇼군은 天皇이 있는 京都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京都의 치안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京都를 동서로 나누어 각각 심복을 책임자로 두었다. 東西로 나눈 것도 서로 감시하는 기능을 주기 위해서다. 그들의 업무연락은 뻔질났다. 나고야가 그 연락로 東海道의 중심에 있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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