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매청, 농협, 일화까지 35년간 오직 한국인삼 매장에서
근무해온 홍콩 세일즈 우먼 첸화이양씨
“인삼과 함께 해 온 반생(半生),
어느 덧 환갑이네요.”
“내가 처음 인삼을 팔기 시작한 건 1974년이었는데, 그때 홍콩 사람들은 한국을 잘 몰랐어요. 게다가 나는 그때 고작 21살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죠. 그냥 세일즈 우먼을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대한민국 전매청을 찾아간 거에요.”
셩완의 약재상 거리 한켠에 있는 일화의 인삼 대리점에는 1974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5년간이나 한국 인삼 매장에서 근무해온
첸화이양(陳蕙英)씨가 있다. 우연찮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찾아가자 그녀는 몇 권의 사진첩을
꺼내들었다.




“예전에는 마카오 페리 오피스 앞에 코리아 센터가 있었어요. 난 거기를 너무 잘 알죠. 20년이나 넘게 거기서 일했으니까. 참
좋은 곳이었는데 1998년, 경제가 어렵다면서 한국정부가 팔아버렸지 뭐에요.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나를 포함해서 총 11명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니라고 한국 여자가 관리자로 있었지요. 제니는 지금은 미국으로 갔지만 당시에는 홍콩남자와 결혼해 홍콩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 외에 한국직원은 없었고 한국에서 한달에 한 번 정도 누군가 출장을 왔을 뿐이죠.”
그녀의 사진첩 안에는 70년대 전매청 매장 사진이며, 코리아 센터 사진 등이 다 들어있었다. 그녀는 하나하나 사진을 짚어가며
35년 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천지량(天地良)같은 특제인삼은 가격이 얼마나 비쌌는지 몰라요. 당시 홍콩에서 인삼은 상당한 고가품이었지만 꽤 잘 팔렸어요.
매장을 열고 처음 얼마간은 고전을 면치 못해서 석달 후에는 매장 직원수를 절반으로 줄였야 했지만 6개월쯤 지나자 모든 것이 좋아졌죠.
광고도 참 많이 했어요. 누가 뭐라해도 한국 인삼을 홍콩에 알린 건 당시 우리 전매청 직원들이었답니다.”
그녀의 사진첩에는 1978년 국제인삼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땠냐고 묻자 그녀는
웃을 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재촉하자 “한국은 참 급속도로 많이 발전했어요. 지금 한국의 풍경을 보면 참 아름다운데
그때는 매연이 정말 심했죠”하고 말했다.
그러나 전매청 생활은 갑자기 끝이 나고 말았다. 1987년 전매청이 민영화되면서 한국담배인삼공사(지금의 KT&G)로 바뀌었고
불행히 그녀의 고용은 승계되지 않았다. 담배인삼공사 면접을 봤지만 ‘세일즈 우먼은 필요없다’고 거부당했다고 했다.
한국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 코리아센터에서 인삼을 팔 수는 있었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한국 농협
고려인삼에서 일했고, 2009년부터는 일화에서 인삼을 팔고 있다. 그녀의 표현대로 ‘반생(半生)’을 인삼과 함께 한 셈이다.
사진 속 그녀의 젊은 시절 모습이 진추하의 전성기를 연상케할 정도의 미모인지라 젊은 시절 한국인과의 ‘썸씽’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당돌한 질문에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안하다가 “당시 한국 남자들은 자기 나라가 무척 힘이 센 줄, 또
자기가 무척 힘이 센 척 했죠”하고 말했다.
코리아센터 인삼매장 윗층에는 한국 영사관이 있었다고 했다. 그 영사들이 내려오면 모두들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야 했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지금 한국 젊은 남자들은 참 나이스해요. 하지만 그때 한국 남자들은 참 권위적이었죠.”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76년 결혼해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고 했다. 아들에게 인삼을 다려준 적이 있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이는 인삼의 쓴 맛을 싫어했어요. 한국 아이들은 그렇게 잘 먹는데….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인삼을 먹으라고 항상 말해요.
몸에 좋으니까, 인삼의 효능을 믿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