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과 중국 사이 벌어지고 있는 무역 전쟁의 포성 속에서, 또 전세계와 우리 대한민국을 향해 겨눠진 관세의 칼날을 보며 협상의 기술과 전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국가의 명운을 건 경제적 담판이나 우리 삶의 작고 큰 분기점이 되는 연봉 협상이나 그 심리적 문법은 놀라울 만큼 닮았다. 감정이 앞선 자는 길을 잃고 철저히 준비한 자의 침묵은 천 마디 말을 압도한다.
법정 안밖에서 수많은 분쟁을 해결하며 깨달은 것은 가장 치열한 싸움조차 결국 더 나은 합의를 향한 길고 고통스러운 협상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매일 무언가를 협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 피할 수 없는 과업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명하게 또 조금 더 우아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 몇 가지 협상에서 도움이 될 만한 생각을 적어봤다. 이는 구체적인 협상의 방법론보다 협상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생각이다.
첫째, 상대는 적이 아니라 다른 무대의 배우라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대를 우리는 너무 쉽게 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상대의 어깨 너머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도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고 그를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상사나 동료가 될 수도 있겠고, 가족이 될 수도 있겠다. 상대는 나를 파괴하려는 전사가 아니라 자신의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하는 한 명의 배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상대의 무리한 요구는 때로 그의 불안감의 다른 표현일 수 있고 그의 단호한 표정은 무대 뒤편의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가면일 수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굴복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의 무대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쳤다는 만족감일 수 있다. 그의 체면을 지켜주면서도 나의 이익을 확보하는 길. 즉 상대가 자신의 관객들에게 자랑할 만한 ‘각본’의 일부를 슬쩍 건네주는 순간에 협상의 막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본다.
둘째, ‘떠날 수 있는 자유’는 나의 가장 단단한 닻이 된다.
가장 위태로운 협상은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절박함은 상대에게 나의 모든 패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우리의 조급함은 상대방에게는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된다.
진정한 힘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자유에서 나온다. 협상에 임하기 전 우리는 ‘이 문이 닫혔을 때, 나는 어떤 다른 문을 열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려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안 (Alternative) 이라는 이름의 닻이다. 이 닻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협상의 폭풍우 속에서 평정하게 배를 단단히 붙잡아 둘 수 있다. 이 고요한 평온함은 “당신의 제안 없이도 나는 괜찮다”는 메시지를 어떤 위협적인 언어보다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셋째, 침묵은 가장 지적인 압박 수단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본능적으로 빈 공간을 메우려는 속성이 있다. 대화가 끊긴 어색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불필요한 말을 꺼내거나 성급한 양보를 제안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상대방이 감당하기 힘든 제안을 던졌다면 즉각적으로 반격하는 대신 잠시 펜을 들어 상대의 말을 받아 적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보라. 그 몇 초의 침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안을 스스로 되짚어보게 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내 논리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요한 시간의 압박 속에서 상대는 종종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침묵은 동의도 거절도 아닌 상대의 내면을 비추는 가장 예리한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주기도 한다.
결국 협상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전투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와 욕망의 지도를 맞춰보며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탐험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궁극적인 것은 상대의 패배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합의라는 보물일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불안과 적대감으로 가득 찬 전쟁터가 아닌, 이성과 창의성이 빛나는 무대 위에서 우리 각자의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