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홍콩에 16년 거주하며 총 5번의 이사를 했다. 한 곳에서 평균 3년 좀 넘게 산 셈이다. 오늘은 기억에 남는 홍콩의 집주인들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두번째 거주지의 주인 부부가 우선 떠오른다. 남편에 비해 아내가 무척 까탈스러웠다. 3년 후 집을 비우고 나갈 때 그 안주인은 눈에 현미경을 장착하고 집안 곳곳을 둘러봤다. 우리가 보기엔 별거 아닌 거였지만 그 분은 하나하나 지적해가더니 결국 보증금에서 몇 백 달러를 공제한 후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런 부류의 집주인은 피곤한 스타일이기에 세입자는 사전에 성향을 파악하여 평소 집기 사용등에 주의해야 한다.
네번째 아파트의 경우는 중간에 집주인이 바뀌었다. 계약을 다시 해야하나 당황스러웠지 만 알고보니 새로 다시 계약서를 쓸 필요는 없었다.
집안의 구조가 좋아 나의 아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다섯번째 집은 딱 2년만이었다. 집주인 딸이 들어와 살 거라면서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집도 사람처럼 인연이라는 것이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같은 동네인 타이쿠싱에서 집을 보러 다녔다. 고민 끝에 저층이었지만 위치가 좋았고 내부가 깨끗한 집이 있어 그곳을 1순위로 정해 계약을 하게 되었다. 집주인은 할머니였는데 계약날 나랑 부동산 중개인이 먼저 와서 그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10분, 20분을 넘겨서도 할머니는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중개인이 다급한 마음에 계속 연락을 시도했지만 깜깜 무소식이었고 우린 결국 자리를 떴다.
다음날 확인해 보니 그 분의 남편이 공교롭게 계약일에 세상을 떴다고 했다. 경황없었던 집주인은 우리와 약속된 곳에 오지 못하고 연락도 안 닿은 것이었다.
중개인의 말을 들어보니 홍콩에서는 가족이 죽으면 여러가지 상황들로 인해 단기간에 계약이 어렵다고 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어 아쉽지만 2순위 집으로 차기 거주지를 변경해야 했다.
2순위 아파트의 주인은 한 회사의 사장으로 홍콩을 자주 비웠고 비서가 대행하여 임대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새 집주인은 내가 이전 계약 시 경험하기 힘들었던 여러가지 까다로운 세부 조건들을 달아 계약 날짜가 계속 지연이 되었다. 홍콩에 살면서 처음 겪는 역대급 까다로움에 ‘다른 곳을 찾아볼까’하는 고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1순위도 떠나가고 마음에 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여러 세부 조건에 맞추는 걸로 해서 이 집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우리도 나중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곳은 미리 사진을 찍어 두었다.
약간의 걱정과 우려로 시작된 홍콩의 6번째 보금자리는 살아보니까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았다. 살면서 별다른 불편함이나 문제가 없어 지금까지 5년간 거주하고 있다. 반대로 같은 동네의 1순위 아파트는 건물 전체가 내부 공사에 들어가며 늘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결국 차선으로 선택한 집이 사실은 최선이었던 것이다.
작년 11월이었다. 홍콩에서의 시위 사태가 절정에 달할 무렵, 학원 사업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집주인의 비서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내 이달 임대료만 $5,000 낮춰 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루 안에 답이 왔다. 장문의 메세지는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임차인이 장기 거주하며 임대료도 제때에 지불한 점, 현 홍콩의 상황을 고려하여 올해 11월부터 내년 4월까지 매주 $1,500의 임대료를 낮춰주겠다”는 내용이었다. 6개월간 $1,500씩 깎아주면 $9,000이 되니까 애초에 내가 제시한 $5,000보다 두 배 가까이 낮춰준 것이 아닌가!
자그마한 사례를 하기 위해 나는 집주인과 비서에게 줄 인삼 제품을 사들고 그들의 회사를 방문했다. 주인은 출장중이었고 비서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자기 선물은 한사코 안 받겠다고 했으나 나는 던져 놓듯 두고 나왔다.
다음날이었다. 나의 아내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집주인이 와인 한 병 보내왔네”. 집주인은 필자의 작은 선물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나의 보답과 집주인의 답례가 이틀 동안 탁구공처럼 왔다갔다 한 것이었다.
계약 당시 까다로운 요구와 조건 때문에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집주인은 예상치 못한 반전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순위를 두고 찍어두었던 집을 갑작스런 사고로 놓치고 차선으로 선택했던 이 집에서 홍콩 생활 최장인 6년간 거주하게 된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집을 구하는 것도 큰 복이며 집주인까지 잘 만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고 나름 만족하며 정을 붙이고 살면 몰랐던 장점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눈 앞에서 떠난 그 1순위 집이 실재 살아보니 숨어있던 단점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차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면 정말 최선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면 그것이 사실은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집을 구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 세상의 이치와도 닿아있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집주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저 사업가답게 꼼꼼하지만 인정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