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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홍콩에서 살기 전 타이페이에 근무할 때였다. 나이가 열두살 띠동갑 형뻘이었던 현지인 까오 선생이 나를 데리고 한달에 한번씩 이민국에 가서 내 비자를 연장을 도와주어야 했다. 물론,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은 혈맹으로, 맹방으로 수교국이라 맨날 입으로는 형제지국 어쩌고 했지만, 실제로 그곳 교민들의 생활은 작고 작은 비자마저 한달에 한번씩 다시 찍어야 하는 수고가 극심했으니, 이유는 바로 그러했다.
60년대 우리 정부(군사정부)가 한국의 화교들의 재산을 규제했단다. 그들은 은행에 계좌를 만들수 없어서, 가까운 한국인의 이름을 빌려야 했다. 허나, 우리민족이 보통민족인가? 세계 최강국도 양코배기, 세계 최대국은 떼놈, 짱꼴라, 바로 얼마전까지 식민지국으로 종주국였던 대일본까지 원숭이 왜놈 하면서, 힘은 하나도 없으면서 붓대롱들고 설치는 선비의 기개 만큼은 모든 부분에서 지구 최강국들을 모조리 넘지 않는가?
반만년 중국과 같은 역사의 반만년 배달의 민족이니, 자기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화교의 돈 버는 꼴을 그냥 보겠는가? 그렇게 족족 빼았아가니.. 그들은 함께 이웃하며 형제처럼 지내던 한국사람 이름을 빌려 은행계좌를 만들었다가 모조리 배반 당했다고 한다. 결국 자기 부엌 나뭇칸 밑에다 장독을 묻고 짜장면 팔아 모은 현금을 착착 모았다가 이것마저 화폐가 자꾸 신권으로 발행되면, 은행에 와서 바꾸라는 권고조차 의심많은 그들은 뺏길까 겁이나서 제때에 못바꿔 휴지조각이 되었다. 사는 집마저 한국사람 명의로 되어 툭하면 그들의 부도에 차압되어 팔려나가는 등, 화교들의 손실이 말도 못했다는 것이다.
자.. 이쯤되니 비록 제주도 보다는 크지만, 비슷하게 생긴 섬나라일지라도, 한국인을 보는 그들의 태도는 미국인, 일본인 또는 유럽인들과 달리 (한-대만) 정부끼리의 관계와는 완전 딴판인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정부끼리는 동맹이니, 혈맹이니, 형제지국이니하며 끌어안고 뽀뽀하고 난리법석을 떨어도, 우리 국민 알기를 한마디로 개떡처럼 서로 관계가 별볼일 없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너희 나라에서 당한 것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적나라한 보복이라 할까? 난 그때 비록 상사의 주재원였지만, 그곳 교민들과 함께 3년간의 한국 국적 마이너러티의 설움을 톡톡히 치뤘다. 그후 시카고 발령을 받아 지나는 길에, 홍콩에서 약 1년간의 예정으로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다.
홍콩, 바로 자유의 상징..!
영국 신사가 150년을 다스린 전통으로 친절하고, 합리적이고, 뭐든지? 진지하고.. 특히, 외국인이 이곳에 살러 온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돈되는 고객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획기적인 공무원들의 발상, 서로간에 문서로만 주거니 받거니, 말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솔직히 세금도 좀 줄여서 보고해도, 의심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친절한 홍콩 세무서 회계사님들!! 이런 홍콩에 대한 대만족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 1년, 3년 그리고 아예 비자면제! 대만에서 삼년간 36번의 비자 연장을 했던 몸서리치는 경험에 난 홍콩에 반했다. 결혼해서 아이도 둘 씩이나 낳았고, 그들은 떳떳하니 어른이 되어간다. 이제 나도 아내도 흰머리 관리를 하다 하다 이제 난 아예 흰색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무려 중국의 모서리에서 30년을 배회하면서 살아온 인증샷, 하얀 머리 사진속의 내 얼굴은 꼭 같은시간 돌아간 그 때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때 하얗던 바로 그 모습이다.
30년 前 내가 그랬듯..
이젠 아이들이 하나 둘 다 떠났다. 대학 마친 딸이 새로운 공부를 한다며 캐나다로 떠나던 날,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결국 눈물을 훔쳤다.
여간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강인하던 그 아이가 눈이 붓도록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내가 기도 중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라고 연민하는 대목에서 이를 이해한 딸애의 가슴이 북받쳤으리라!.. 나도 부모로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나 혼자만 이역에서 마치 부평초처럼 물길에 떠내려가는 인생이라 생각했다. 사업하며 힘들고 외롭고 고립무원의 무력감을 느낄때면 남 몰래 홀로 눈물짖곤 했었다..
IMF금융사태로 사업이 하나둘 무너지고 은행 빚을 갚아야할 지경에 정리 중이던 중국의 시골구석 공장에서 어머님의 임종소식을 들었을 땐,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침대를 내려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무력감, 절망감, 막다른 골목에 선 외로움에 모든 것 다 떨어버릴까 처절함에 홀로 치를 떨기도 했었다. 회상해보면 사업하다 좋을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난 항상 어려울 때는 혼자였다… 나 혼자 모든 어려움, 지저분한 뒤처리를 나홀로 다 해야 했으니까..
홍콩 공항에서의 포옹, 그리고 작별..
아내와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 긴 침묵의 순간, 우린 똑같이 우리 아이들의 외로움, 마이너리티의 고독에 대해서 생각했고, 아내는 딸이 황망히 떠난 방을 정리해 주면서 이곳에서 얼마나 스스로 고민하며 외로웠을까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간 그에게 못마땅하면 늘 소리치고 혼내고.. 일방적으로 내 주장을 폈던 점이 가슴이 미어졌다..
소수 인종으로, 언어로, 문화적으로, 성격으로, 학력으로, 성적으로.. 어떤 면으로 든 다수에 끼지 못한 면이 있으면 우린 마이너리티(minority)라고 부르면서, 기회평등(equal opportunity)를 부르짖는다. 정말 소수자로써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마이너리티로써의 삶을 절대 이해할수 없다. 그리고, 그런 단어와 슬로건 자체가 다수자 즉, 메이저리티(majority)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쩌면 우린 그들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마이너러티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들의 관대함에 고마워할뿐..
나는 딸을 캐나다로 보내던 그날부터 깨달았다. 소수자로써 우리의 장애는 결국 우리끼리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우리 가족 안에서는 절대 소수자가 아니다. 바로 아무런 장벽이 없는 우리 가정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로 결합한다면 결국 사회도 어디도. 그곳에서의 어려움은 극복될 것이라고…
글 이대우 (CKC Technolog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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