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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치화 별세] "홍콩 경제의 거목이 지다"… 홍콩 전역, 경제계 일제히…

[퉁치화 별세] "홍콩 경제의 거목이 지다"… 홍콩 전역, 경제계 일제히 추모

홍콩의 2대 주요 경제단체가 홍콩의 첫 행정장관인 퉁치화(Tung Chee-hwa)의 별세에 추모의 뜻을 전하며, 경제 발전과 '일국양제(One Country, Two Systems)' 이행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렸다고 홍콩 언론들이 보도했다. 홍콩부동산개발협회(REDA)는 퉁치화 전 장관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그의 유족에게 조의를 전했다. 협회는 퉁 전 장관이 반환 후 홍콩의 첫 행정장관으로서 일국양제를 이행하고 기본법을 수호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협회는 "퉁 전 장관은 국가와 홍콩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그의 봉사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전했다. 홍콩중화제조업총회(CMA) 역시 퉁 전 장관과 그의 유족에게 추모의 뜻을 전했다. 총회는 퉁 전 장관이 아시아 금융위기와 사스(SARS) 사태 등 난관 속에서 회복력과 리더십을 발휘해 도시를 이끌었고, 홍콩의 후속 경제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윙코 로(Wingco Lo Kam-wing) CMA 회장은 2003년 중앙정부와의 경제적인접협력협정(CEPA)을 성사시킨 동 전 장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로 회장은 해당 협정이 자격 요건을 갖춘 품목에 대해 대륙 무관세 접근을 제공하고 서비스 산업의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춤으로써 홍콩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또한 총회는 사스 이후 홍콩의 관광, 리테일, 외식업 분야의 회복을 도운 개인방문스킴(Individual Visit Scheme)을 추진한 퉁 전 장관의 노력을 짚었다. 총회는 동 전 장관을 통찰력과 강한 책임감, 국가와 홍콩에 대한 깊은 헌신을 가진 지도자로 묘사하며 그의 기여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휠록(The Wharf)의 수석 고문인 피터 우(Peter Woo Kwong-Ching) 고문은 "동 선생은 국가와 홍콩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을 보여준 평생의 애국자였다"며 "그의 성과는 유산이자 후대에 모범으로 남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한 홍콩 사회에 대한 동 전 장관의 오랜 세월에 걸친 헌신적이고 무사안일 없는 기여를 찬사했다. 우 고문은 "그의 고결한 정신은 결코 시들지 않고 인도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시노그룹(Sino Group)의 다릴 응(Daryl Ng Win-kong) 회장 역시 동 전 장관의 유족에게 진심 어린 조의를 표했다. 응 회장은 "홍콩연대기원(Hong Kong Chronicles Institute), 우리홍콩재단(Our Hong Kong Foundation), 중미교류재단(China-United States Exchange Foundation)을 통해 퉁 전 장관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으며, 그의 지도와 모범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이 동 전 장관의 지혜와 따뜻함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콩 역사 바꾼 '최초의 수반' 퉁치화, 89세 일기로 별세

홍콩 역사 바꾼 '최초의 수반' 퉁치화, 89세 일기로 별세

홍콩 특별행정구의 첫 행정장관이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 전 부주석인 퉁치화(Tung Chee-hwa)가 화요일 밤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퉁치화 전 행정장관 사무실이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그는 오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사무실 측은 성명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퉁치화 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이자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2026년 9월 8일 향년 89세로 평온히 별세하셨다"고 밝혔다. 사무실 측은 퉁치화 전 행정장관을 국가에 깊이 헌신하고 공공서비스에 지칠 줄 모르고 봉사한 강직한 인물로 기억하며, 그의 품성과 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7월 1일 열리는 주권 반환 기념식을 포함한 주요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며 대중의 시선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37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선박왕 퉁차오융(Tung Chao-yung)의 장남으로, 12세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1960년 리버풀 대학교(University of Liverpool)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가업에서 일했다.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1969년 홍콩으로 돌아와 가문의 해운 사업 관리를 도왔다. 198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가문이 소유한 오리엔트 오버시즈(Orient Overseas) 해운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공직에 입문하기 전 홍콩 비즈니스계의 거물로 자리를 잡았다. 그의 정치적 커리어는 1996년 홍콩 특별행정구의 첫 행정장관으로 선출되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영국의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이양된 1997년 7월 1일 취임하여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 틀 아래 홍콩의 첫 지도자가 됐다.

"선박왕 가문에서 홍콩 초대 수반까지" 퉁치화의 파란만장했던 생애

"선박왕 가문에서 홍콩 초대 수반까지" 퉁치화의 파란만장했던 생애

홍콩 특별행정구의 초대 행정장관을 지낸 퉁치화(Tung Chee-hwa, 董建華)가 화요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고인이 선박왕 고(故) 퉁차오융(Tung Chao-yung)의 장남이자 홍콩 최고 부유층 가문 출신으로서 걸어온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홍콩 성도일보가 보도했다. 초년기 및 학창 시절 1937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내전 기간 중 가족과 함께 어릴 적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는 홍콩의 중화중학(Chung Wah Middle School)에 다녔다. 이후 1954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1960년 리버풀 대학교(University of Liverpool) 해양공학과를 졸업했다. 해운업계에서의 경력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등 미국에서 10년간 근무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1965년 가업에 합류했다. 1979년 오리엔트 오버시즈(Orient Overseas)의 수장 자리에 올랐으나, 세계적인 해운 불황 속에 회사는 곧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1985년 무렵 회사는 심각한 부채에 시달렸다. 1년 후, 고(故) 헨리 폭(Henry Fok)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 부주석이 이끄는 1억 2,000만 미국달러(약 1,701억 6,000만 원) 규모의 구제금융이 투입되면서 회사는 가까스로 도산을 면했다. 1992년까지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회사를 다시 흑자로 돌려놓았다. 기업인에서 행정장관으로 수년간 비즈니스 현장에서 활약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국제적 감각과 실무 경험을 갖추었으며 대만, 미국 등의 정재계 인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가업을 성공적으로 구출해 낸 그의 능력은 위기 관리 능력과 가문 기업을 지켜낸 집념을 입증해 주었다. 이러한 자질 덕분에 그는 중앙정부의 인정을 받고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얻어 주권 반환 후 홍콩의 첫 행정장관 출마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96년 그는 선거 출마를 위해 오리엔트 오버시즈(인터내셔널) 유한회사의 회장 및 최고경영자(CEO) 직에서 사임하고 가업을 동생인 퉁치천(Tung Chee-chen)에게 넘겼다. 그는 성공적으로 당선되어 1997년 7월 1일 취임하며 홍콩 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공직 사퇴 이후의 삶 2005년 행정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 전국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되어 2023년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 그는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2014년 6월 16일에는 알리바바 그룹(Alibaba Group)의 독립사외이사로 영입되었다. 당시 알리바바는 퉁치화 전 행정장관의 전략적 비전, 비즈니스 및 정부 지도자로서의 경험, 그리고 미·중 양국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해 온 오랜 경험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사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평생 불교도이자 열렬한 리버풀 FC 팬이었다. 아내 베티 퉁(Betty Tung)과의 사이에 3명의 자녀와 9명의 손주를 두었다. 공식 서류상 생년월일은 1937년 5월 29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출생일은 중일전쟁의 발화점이 된 노구교 사건(Lugou Bridge Incident)이 발생한 1937년 7월 7일이다. 퉁치화 전 행정장관이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과의 연관성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나중 날짜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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