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하버, 빅토리아 피크, 빅토리아 파크. '빅토리아’의 이름은 어떻게 온 걸까? -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빅토리아 하버, 빅토리아 피크, 빅토리아 파크. '빅토리아’의 이름은 어떻게 온 걸까? -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명소 중에는 ‘빅토리아’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빅토리아 여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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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간 재위 -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를 한 빅토리아 여왕

 

영국 빅토리아 여왕(Alexandrina Victoria)은 1837년 6월 20일부터 1901년까지 63년 216일간 재위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 기간을 기록한 군주(엘리자베스 2세 이전)로, 빅토리아 시대를 상징한다. 

 

그녀는 켄싱턴 궁전에서 조지 3세의 네 번째 아들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생후 8개월 만에 사망한 후 어머니와 존 콘로이의 엄격한 감독 아래 성장했다. 삼촌들이 적법한 후손을 남기지 않아 18세에 즉위했으며, 버킹엄 궁전을 공식 거처로 삼았다.  1840년 사촌인 앨버트 공과 결혼해 9명의 자녀를 두었다. 훗날 이들이 유럽 왕가와 혼인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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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영광을 함께 한 빅토리아 여왕


세계 근현대사에서 영국은 한참 잘 나가던 시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다. 이 영광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맞이하였다. 업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전성기, 과학·기술·교통(철도, 전신 등)의 비약적 발전, 도시화와 제국 팽창을 들 수 있다. 대영제국은 그녀의 재위 기간에 세계 육지의 약 1/4, 4억 명의 인구를 주무르며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캐나다, 호주, 인도, 아프리카 일부, 홍콩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입헌군주로서 내정에 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엄격한 도덕·가정 가치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자선 활동과 제국의 통합을 강조했다. 크리미아 전쟁 중 부상병을 위문하고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제정하는 등 군사적 상징성도 강화했다. 공화주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인기를 회복·유지한 점이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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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고 우울증에 빠진 여왕, 그리고 디즈레일리

 

 

이렇게 화려한 대영 제국의 전성기를 함께 한 여왕이었으나 그녀의 개인사에는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 1861년 남편 앨버트가 사망한 후 여왕은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은둔하게 된다. 앨버트는 교육·문화·공공사업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빅토리아가 국정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동반자 역할을 하였다. 우울증에 빠진 여왕을 보좌하며 힘을 실어준 사람이 디즈레일리 수상이었다. 

 

그는 절대권자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최선을 다했다.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를 여왕이기 전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한 여자로서의 슬픔을 이해하며 그녀가 우울증을 이겨내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애썼다. 

 

1876년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인도의 황제’라는 칭호를 주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왕은 이 의견이 매우 마음에 들었으며, 깊이 감사했다. 이 두 사람은 여왕과 수상, 남자와 여자라는 직위와 성별을 떠나 뜻이 잘 맞는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홍콩과의 관계

 

 

홍콩과의 관련은 제1차 아편전쟁(1839~1842)과 직결된다. 여왕 즉위 직후 발생한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제3조에 따라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 여왕 폐하와 그 후손에게 영구히’ 할양했다. 이후 홍콩은 영국 식민지가 되었고, 초기 도시 지역은 ‘빅토리아 시’ 또는 ‘시티 오브 빅토리아’로 명명되었으며, 퀸스 로드 등 여러 지명에 그녀의 이름이 붙었다.

 

여왕의 재임 50주년 행사인 골든 주빌리(1887)를 기념해 홍콩에서 공공 모금으로 마리오 라지(Mario Raggi) 조각의 동상이 제작되어 1896년 제막되었다. 동상은 일본 점령기 때 손상을 입은 후 복원되어 현재 코스웨이베이의 빅토리아 공원에 세워져 있다. 재임 60주년 행사인 다이아몬드 주빌리 때도 홍콩에서 대규모 축하가 열렸다.


빅토리아항을 덩샤오핑항으로? 개명에 대한 논의

 

 

홍콩의 중국 반환 후 식민지 색채를 지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2018년, 전국정협 홍콩 대표가 일부 거리를 중국 지도자 이름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빅토리아 항을 ‘덩샤오핑 항’, 데보 로드를 ‘마오쩌둥 로드’ 등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온라인에서 비판을 받았다.

 

작년에는 입법회의원 허쥔야오가 식민지 색채가 강한 거리·공원 이름을 재검토하고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빅토리아 공원을 ‘다웨이리 공원’ 등으로, 퀸스 로드의 영문 표기를 ‘웡하우 로드(Wong Hau Road)’로 바꾸자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으나,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존 식민지 지명은 행정적·경제적 비용과 시민 생활의 혼란을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홍콩 명소에는 아직까지도 여왕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임 기간 동안 여왕이 홍콩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신 두 세기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홍콩 곳곳에 남아 있는 ‘빅토리아’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참고 문헌 >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MIRAE BOOK, 김옥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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