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경제칼럼] 호르무즈가 막힌 날, 계약서가 무기가 되었다 - 박완기 홍콩법정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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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경제칼럼] 호르무즈가 막힌 날, 계약서가 무기가 되었다 - 박완기 홍콩법정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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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가 막힌 날, 계약서가 무기가 되었다


2월 28일 오전, 미국과 이스라엘은 ‘에픽 퓨리’ 작전으로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동시다발 타격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사망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즉각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를 선언했다. “호르무즈를 지나는 모든 선박을 불태우겠다.” EIA 기준으로 원유•콘덴세이트•석유제품을 합산하면 하루 약 2,000만 배럴, 원유•콘덴세이트만 집계해도 약 1,420만 배럴이 통과하는 좁은 수로가 사실상 막힌 것이다.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약 27%에 달하는 물량이다.


“파이프라인으로 우회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은 숫자 앞에 무너진다. UAE의 ADCOP 파이프라인은 하루 150만 배럴, 사우디의 페트롤라인은 하루 500만 배럴을 처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이미 사용 중인 물량을 빼면 여유 용량은 약 350만 배럴에 불과하다. 우회로는 있되, 대체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브렌트유는 3월 6일 기준 배럴당 92.69달러까지 치솟았고 유럽 천연가스 선물(TTF)은 40% 넘게 폭등하며 €65/MWh를 돌파해 2023년 에너지 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삼일절 연휴를 보내고 복귀한 한국 시장은 냉혹했다. 코스피 7.24% 급락, 원•달러 환율 1,466원 돌파, 외국인 순매도 5.17조 원. 단 하루 만의 기록이다. 이틀 뒤에는 코스피가 12.06% 폭락하며 지수 산출 46년 역사상 최대 일일 하락을 기록했다. P&I 보험 클럽들은 3월 5일부터 호르무즈 통항 선박에 대한 전쟁위험 보험을 철회했고 보험료는 12배 이상 폭등했다. 선박이 항해할 능력이 있어도 보험이 없으면 어떤 항만도 입항을 허가하지 않는다. 보험 철회는 곧 항로의 소멸이다. 물리적 봉쇄가 아니라 보험의 소멸이 사실상의 봉쇄를 완성한 셈이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가 중동에서 온다. 그 중동산 원유의 95%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하지만 충격은 원유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 3위 LNG 수입국이며 그 수입량의 약 15%를 카타르에서 조달한다. 중동 전체로 넓히면 LNG 수입의 약 20%다. 카타르 LNG 역시 호르무즈를 경유한다. 발전소와 도시가스, 석유화학까지 에너지 공급망의 두 줄기가 동시에 같은 병목에서 막힌다. 비축유는 민간 포함 약 208일분이 있지만 계속 비축유만 사용할 수도 없다. 


한국국제무역협회(KITA) 분석에 따르면 운임은 최대 80% 상승이 전망되고 상하이 컨테이너 운임지수(SCFI)는 이미 1,489.19포인트로 11.71% 급등했다. 유가 10% 상승 시 국내 기업 원가가 0.38% 오르고 수출이 0.39% 줄어든다는 KITA 산하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분석에 운임•보험료 폭등분까지 더하면 실제 충격은 훨씬 가파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단순한 유가 급등으로만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생포에 이어 이란 하메네이 제거까지 미국은 중국에 에너지를 공급하던 반미 대리국 지도부를 연달아 물리적으로 타격하는 ‘참수 전략’을 노골화했다. 중국은 이란 원유 수출의 약 90%를 흡수하는 사실상의 유일한 대량 구매자다. 베네수엘라산 원유 역시 중국이 최대 수입국이다. 마두로 체포 직후 “중•러와 관계를 끊고 미국에만 석유를 팔라”는 압박이 베네수엘라에 가해진 것은 이 전략의 본질을 드러낸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대한 관세 압박도 강화했다. 1월 27일 한국산 수입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고 2월 20일 연방대법원이 IEEPA 기반 관세를 위헌으로 결정한 뒤에도 무역법 122조에 따른 글로벌 10% 관세를 즉시 부과하며 한국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가 조치를 예고했다. 


호르무즈 봉쇄가 에너지 공급을 틀어막는 동안 관세 체계의 잇따른 교체는 수출의 출구마저 불확실하게 만든다. 에너지 타격과 수출 타격이 동시에 한국을 압박하는 이중 구조다. 중동 에너지 공급망의 목을 조르면서 동맹국에게도 예외 없이 관세를 무기화하는 미국의 전략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통상 리스크가 사실상 하나의 압력으로 수렴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이 거시적 충격 앞에서 국제분쟁 사건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의 눈에는 이미 다른 전장이 보인다. 원자재 공급사가 납품을 지연하거나 가격을 올리면서 가장 먼저 꺼내 드는 방패는 계약서상의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이다. 하지만 영미법계 중재 판정부의 시각은 냉혹하다. ICC 중재 사례에서 단독 중재인은 정부의 수출 금지 조치를 불가항력의 근거로 내세운 피신청인에 대해 그 조치가 관보에 공식 게재되지 않은 비공식 행정 서한에 불과했다는 이유로 불가항력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시장 가격 하락이 예견 가능했다는 이유로 불가항력을 부정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영국 법원 역시 락다운을 불가항력으로 인정하는 데 극도로 인색했다. 핵심 요건은 일관되다. 당사자가 합리적으로 예견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IEEPA에서 무역법 122조로의 관세 법적 근거 교체, 베네수엘라 침공, 이란 공습은 이미 시장이 인지하고 있는 ‘상수’가 되었다.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운임•보험료 폭등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기본 원가(Cost of Doing Business)’로 취급될 공산이 크다.


계약의 호흡도 바뀌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유가•운임 지표에 연동된 가격 조정 기제를 계약서 안에 심어두는 일이다. 고정 단가가 아니라 시장 현실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조항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불가항력 조항을 넘어 비용이 일정 임계치를 초과할 경우 협상 의무를 발동시키는 하드십(hardship) 조항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번 위기가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출구의 설계다. 에너지 가격이나 공급선이 급변하더라도 손실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정교한 종료 조항(Exit Clause)이 5년•10년짜리 장기 계약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법적 근거가 수시로 바뀌고 에너지 공급국의 지도자가 언제 제거될지 모르는 시대에 고정된 장기 계약은 안전판이 아니라 거대한 리스크 덩어리다.


결국 2026년의 진짜 적은 유가 자체가 아니다. 208일의 비축유가 제공하는 단기 완충 뒤에 남는 것은 70%의 중동 의존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이고 면책받지 못할 계약서를 들고 파트너와 벌이는 내부의 소송전이다. 호르무즈가 다시 열리더라도 이번 위기가 드러낸 에너지 안보의 사각지대와 계약의 맹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정학이 경제를 집어삼킨 시대, 나침반과 계약서를 동시에 쥔 자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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