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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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 무술의 흥망성쇠, 이소룡의 아~ 옛날이여‘홍콩’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이소룡, 성룡, 이연걸 주연의 당대를 주름잡던 무술 영화이다. 이는 곧 홍콩이 ‘무술의 메카’였기 때문이었다. 무술이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홍콩 생활 깊숙히 자리잡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홍콩에 와서 살고 있는 교민이라면 주변에 무술을 배운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도 이후 주윤발을 필두로 한 누와르 영화로 세대 교체를 한 후 정통 쿵푸 영화는 극장 간판에 거의 걸리지 않고 있다. 홍콩인들은 왜 무술과 거리가 멀어진 것일까? 중국 무술이 홍콩에서 성행하게 된 이유는? 사실 무술은 중국 본토에서 유래되었다. 그 유명한 중국 ‘소림사’는 무술이 태동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홍콩에서 크게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와 맞닿아 있었다. 19세기 말, 국운이 쇠퇴하는 시기에 중국 사회에는 청나라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인물들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청나라 조정의 수배를 당하며 도망치는 사회 인사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이때 이들이 몸을 피해 건너 간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은 영국 정부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에는 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광동 불산에서 활약한 황비홍의 수제자인 링완까이, 사마귀 권법의 대부인 라우수이빈 역시 이즈음 홍콩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반청 운동을 하다가 중국 대륙에서 ‘사고’를 치고 건너온 무예인들은 홍콩에서 도장을 차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중국 대륙에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무술이 핍박을 받았다. 한 예로1966~1976년에 발생한 문화대혁명 시기, 소림사는 약탈을 당했고 승려들은 투옥되었다. 이때에도 중국의 무예인들은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홍콩 무술의 전성시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대륙의 많은 무예인들이 홍콩에 몰리며 홍콩 사회를 무술의 도시로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 형성된다. 당시는 사람들의 취미 활동이 다양하지 않았던 시기였는데, 무술은 이 빈틈을 파고 들었다. 치안이 불안한 상황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동기 유발을 이끌었다. 홍콩 사회에 무술이 전성기를 누린 것은 1960~1970년대이다. 한때 홍콩 전체에 무도관이 418곳이 있었고, 무술을 배우는 인구는 약 1만 2천 명에 달했다. 이소룡 영화와 김용의 무협지가 누린 인기도 무술 전성시대에 영향을 끼쳤다. 대륙에서 건너온 ‘사부님’들은 주로 임대료가 저렴한 옥상에 무도관을 열어 제자들을 양성했다. 도장은 주로 저녁이 되어 문을 열었고, 옥상마다 힘찬 북소리와 기합 소리가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당시 홍콩 사회의 진풍경이었다. 홍콩 무술의 쇠퇴기 1980년대가 되어 홍콩의 무술은 쇠퇴기를 맞이해야 했다. 1970년대에 전성기를 이뤘지만, 당시 사회적 병폐도 생겨났다. 무도관끼리 충돌이 생겼고, 조폭들과도 연계되었다. 1974년 정부 조사에 따르면, 흑사회(조폭)와 관련된 무도관이 3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무도관들은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자춤과 용춤 공연도 병행하여 행사장을 찾아다녔다. 이때에도 조폭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들로 결국 정부는 메스를 들이댄다. 무도관 운영에 대한 규정을 강화한 것이다. 정부의 관리 강화는 1973년경 시작되어 1980년 법령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무도관의 경영을 어렵게 하였다. 소방 관리법도 강화되어 옥상에 자리잡은 무도관은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홍콩의 마지막 옥상 도장은 2010년 4월에 문을 닫았다. 이에 더해 다양한 취미거리도 선택의 폭을 넓혔다. 축구나 농구 등 타 스포츠 종목이 인기를 얻게 되었고, 격투기로는 태국 복싱이 유입되어 무술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더 이상 무술에 관심이 없는 홍콩인들 현재 홍콩 사람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임, 영화, 드라마, 그 외에 여가 시간을 메워줄 활동들이 즐비하다. 운동을 한다 하더라고 각종 구기 종목이나 하이킹, 수영, 요가 등을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무술과 같은 격투기의 경우 무에타이 등을 선호한다. 필자가 십 수년간 한국어 수업을 하며 만난 홍콩 사람들 중 무술 도장에 다닌다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대신 무에타이를 배운다는 여성들은 간간히 눈에 띄었다. 또한 현대인들은 스포츠를 선택할 때, 기왕이면 몸매도 아름답게 가꿔주는 운동을 선호하는 것 같다. 코로나가 사라진 이후, 문을 닫았던 피트니스 센터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것을 보면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운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필자는 주말이면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데, 몸 좋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죄다 웃통을 벗고 뛴다. 무에타이를 배우는 여대생인 발레리에 응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술 사부들의 근육은 멋있어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뚱뚱한 사람도 있다’고 한 말은 젊은이들이 무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드러낸다. 이에 더해 홍콩의 높은 임대료는 무술의 부활은커녕 명맥을 잇기도 어렵게 한다. 현재 사부들 중 상당수는 수강생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공원 등의 장소에서 지도하고 있다. 결국 홍콩의 전설 이소룡이 무덤에서 박차고 나와야만 홍콩의 무술붐도 다시 살아날까?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이연걸의 황비홍, 견자단의 엽문 같은 정통 무술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 참고자료 > “李小龙“退场”,香港功夫文化衰落”, 纽约时报中文网 “天台武館:一部武館史,半部香港史”, 香港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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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현 목사의 생명의말씀] 가볍게 살아가기홍콩우리교회가 있는 침사추이는,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입니다. 여러 나라서 온 관광객을 비롯, 중국에서 쇼핑하기 위해 방문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어떤 사람은 짐 없이 가볍게 다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많은 짐을 들고 다닙니다. 여러 개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모두 터질 듯 가득 짐을 담았습니다. 그 짐을 감당 못해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 사람을 보면 궁금합니다. ‘저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많은 사람이 여행을 합니다. 그 중 짐을 잘 싸는 사람과 짐을 못 싸는 사람이 있습니다. 짐을 잘 싸는 사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꼭 필요한 것만 싼다. 2) 캐리어의 공간을 다 채우지 않는다. 약 70%정도만 채운다. 여행 가서 선물을 받거나 갑자기 꼭 필요한 물건을 사게 될 경우 나머지 30%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3) 항공사가 요구하는 무게를 잘 맞춘다. 반대로, 짐을 못 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반대의 특징을 갖습니다. 1) ’여행 가서 한 번은 쓰겠지’라며 필요 없는 물건을 넣는다. 헤어드라이어, 발맛사지 기계. 심지어 에어프라이어를 들고다니는 사람도 있다. 2) 꽉 눌러담아 캐리어 공간을 모두 채운다. 캐리어에 안들어가는 짐은 손에 들고 다닌다. 3) 항공사가 정한 무게를 맞추지 못해 추가요금을 낸다. 짐을 잘 싸기 위해서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현지에 가서 살 것은 무엇인가? 도보 이동이 많은가? 숙소 이동할 때 짐 때문에 힘들지는 않은가?’ 등. 여러 생각의 결과가 짐에 반영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행할 때 괜히 필요 없는 짐을 싸서 들고 다니느라 지치고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많은 것들을 들고 다니며, 또한 쌓아둡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언제 넣어두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음식이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물건을 샀는데, 이미 집에 있습니다. 옷장에 옷이 많은데, 입을 옷이 없어서 또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영역인데요, 이렇게 방치되거나 중복된 물건들은 비용을 소모합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보관과 유지 비용이 들지요. 물질적인 비용 뿐 아니라, 심리적인 비용도 듭니다. ‘이건 언젠가 사용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잡으며 나의 에너지를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지치죠. 물건이 많아질수록, 심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됩니다. 물건 뿐 아닙니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라며 저장해 둔 연락처가 많이 있습니다. 일년에 한 번도 연락 안 하지만, 계속 남아 있습니다. 핸드폰에는 사용하지 않는 앱이 설치된 채 용량을 차지합니다. 사진 정리는 하지 않으면서 용량이 부족하다고, 다음 핸드폰은 더 용량이 큰 모델로 구입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잊고 있다가 만나면, 나쁜 감정이 튀어나옵니다. 내가 실수했던 일을 잊지 못하고 담아둡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상처 되는 말을 쌓아둡니다. 그것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얽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루를 지내면서 필요 이상으로 지치도록 만듭니다. 주로 완벽주의적인 성향, 내향적 성격인 분들이 더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가볍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2: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름 떼같이 엄청나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방해되는 무거운 것은 다 떨쳐 내 버립시다. 쉽게 달라붙는 죄도요. 견뎌 내면서 우리 앞에 놓인 경기의 달음질을 달려갑시다. (히12:1. 새한글성경) 달리기 선수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뛰는 일은 없습니다. 레슬링 선수가 모피 코트를 입고 시합에 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경기에 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합니다. 계체량을 위해 소변을 보면서까지 몸의 불필요한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방해되는 무거운 것은 떨쳐내야 경기에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양심에 찔리고 누군가 내 죄를 드러낼까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11:28. 개역개정성경) 우리가 무거운 짐 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아시고, 그 짐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 필요한 태도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든 원인을 살펴보면, 많은 물건과 감정을 이고 지고 살아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무겁게 하고 있는 물건, 마음의 짐, 죄책감, 상처 등이 있으신가요? 이 글을 읽으신 김에, 정리할 것들을 정리해보시면 어떨까요? 홀로 정리하기 힘드신 문제는 함께 나누어주세요. 홍콩우리교회는 언제나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이번 한 주도 가볍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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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현 목사의 생명의말씀] 광복의 두 의미(光復)저는 홍콩 오기 전, 제주 동쪽에 살았습니다. 성산일출봉이 유명한 곳입니다. 혹시 성산일출봉에 가 보셨나요?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이 성산일출봉을 방문하지만, 의외로 일출봉에 깃든 아픈 역사는 모릅니다. 성산일출봉은 2차대전 때 전쟁을 위한 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이 아름다운 성산일출봉을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성산일출봉 입구 앞은 여러 식당이 모여 있습니다. 식당들 골목 사이로 1분 정도 가면 해안선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내려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오래된 계단은 마지막 계단이 없어져 내려가기 불편합니다. 해안선은 매우 좁고, 모래가 없습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만조 때 물에 옷과 신발이 다 젖습니다. 그렇게 성산일출봉 하단에 이르면, 동굴이 여럿 보입니다. 자연 동굴이 아닙니다. 전쟁을 위해 만든 군사 기지입니다. 일본이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자폭 보트를 비롯, 여러 전쟁 무기를 준비해놓았던 기지입니다. 오키나와까지 함락되면 최후 저항을 할 곳으로 제주를 정했고, 곳곳에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동굴을 파기 위해 제주도민을 징용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깊이 파 놓은 굴은, 제대로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찾기도 어렵고 들어가도 으스스해서 곧 나올 정도입니다. 이곳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제대로 된 안내판도 없습니다. 역사를 알고 나니 성산일출봉이 다르게 보입니다. 관광지이지만, 참 슬픈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 뿐 아니라, 제주 곳곳에 일본이 만든 군사기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광복절 80주년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역사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이번 주는 광복절이 있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광복(光復)이라는 말의 두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광복이라는 말은, 본래 “영예롭게 회복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멸망했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유씨 왕조의 맥을 다시 이은 것이죠. 이 일을 ‘광복구물’(光復舊物)이라고 했습니다. ‘옛 것을 빛나게 다시 세운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뒤에 ‘구물’이 떨어져나가고 ‘광복’만 쓰게 되었죠. 기원이 이러하므로 본래는 뭔가 나라의 비정상인 것(왕조, 정권, 정책 등)을 정통으로 돌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일본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비정상인 것을 정통으로 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광복의 또 다른 의미는, “빛을 되찾음”입니다. 고사성어와는 별개로, 말 그대로 해석한 뜻입니다.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시기는 말 그대로 ‘어둠’이었습니다. 말을 빼앗기고, 문화재를 빼앗기고, 사람을 빼앗기고,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언제 끝날지 몰랐던 그 시기는,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습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돌아왔습니다. 이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써나갑니다. 전쟁과 분단과 여러 일들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을 때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을 찾은 나라의 모습. 모든 것이 원래대로 회복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인간은 빛 가운데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음으로 어둠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받는 이유. 모든 아픔의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빛을 보지 못하니 괴롭습니다. 어둠 속에 있으니 시들시들하고,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인간에게, 빛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빛이 필요합니다. ‘광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깊은 어둠이라고 해도, 빛을 비추면 어둠은 빛의 속도로 사라집니다. “1:4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 어둠은 빛을 눌러 이기지 못했다.”(요한복음1:4-5. 새한글성경) 하나님은 우리가 ‘광복’ 즉 1)하나님이 지은 원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2)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민족 모두에게 ‘광복’이 임한 것처럼, 개개인에게도 ‘광복’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광복을 맞이한 우리가 지금의 대한민국이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도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여 멋지고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은 빛이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광복의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한 주도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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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용 변호사의 법률칼럼] Hearsay Evidence (전문(傳聞) 증거)김 사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섣불리 김 사장의 주장만을 토대로 Denise를 혐의자로 말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민사소송에 비하여 훨씬 높은 형사소송의 입증책임 등, 다수의 법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겠지만, Hearsay Evidence를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Hearsay란 법정 밖에서 개인이 말한 진술을 뜻하며 증거법상 이런 진술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런 원칙의 법적 논리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증인이 법정에 출두하여 상대도 반대심문을 할 기회를 부여해야 하는데, Hearsay의 경우 증인의 진술은 법정 밖에서 한 것이기에 법정에서는 반대심문을 할 대상자가 없으므로 상대방에게 불공평하다는 논리이다. 위 사례에서도 법정에는 손님이 아닌 김 사장이 출두하여 진술하는 것이기에 Denise가 그 손님을 상대로 반대심문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법원은 김 사장의 “손님이 말하기를 Denise가 인삼 제품을 훔쳤다”라는 증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Hearsay도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Dying declaration(임종시의 진술)’이라 하여 살인사건과 관련해 진술한 사람이 사망했다면, 사망 전 제3자에게 한 진술은 Hearsay임에도 불구하고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 일례로 A가 B를 칼로 찌르고 도주한 뒤 B가 행인 C에게 A의 신원을 알리고 사망하였다면 C가 법정에서 “B가 말하기를 A가 범인이라 하였다”라는 증언을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사사건에 있어서는 Hearsay 증거를 채택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는데 기본적인 틀은 제출하고자 하는 증거가 Hearsay라는 이유만으로 증거채택을 무조건 불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증거가 채택되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일방이 채택을 반대하고 법원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될 경우는 Hearsay Rule를 인정하고 채택을 거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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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전통 사자춤, 용춤이 금지되었던 까닭은?오늘은 홍콩의 무형 문화제에 등록되어 있는 4대 전통 춤을 소개한다. 이들은 축하를 위한 주요 행사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복을 기원하고 흥을 돋워준다. 사자춤 - 한때 정부가 사자춤을 금지시킨 이유는? 사자춤하면 떠오르는 홍콩 영화가 있다. 서극 감독, 이연걸 주연의 황비홍 시리즈 중 3편인 ‘황비홍-사왕쟁패(黃飛鴻之三獅王爭覇: Once Upon A Time In China III)’이다. 여기서 ‘사왕’은 사자왕을 말하는데, 사자춤을 추며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화면을 채운다. 사자춤은 홍콩을 포함한 중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연이다. 머리와 몸통의 두 부분으로 나누며, 두 명이 탈 안에서 조종하며 춤을 춘다. 명절, 혼인, 제사, 신장 개업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신에게 기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동시에 좋은 일에는 더욱 흥을 돋우고, 나쁜 일에는 슬픔을 잠재우기 위해 사자춤을 춘다. 사자춤이 홍콩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1940년대이다. 중국의 많은 무예인들이 대거 홍콩에 몰려든다. 이들은 각지에 도장을 열어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친다. 이때 사자춤도 함께 발전을 이뤄나간다. 홍콩의 사자춤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도 있다. 도장마다 사자 및 용춤을 추는 구성원들은 경쟁이 치열하였다. 이로 인해 무도관들끼리 종종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곤 하였다. 조폭들은 개업하는 상점을 찾아가 사자춤 공연을 구실로 돈을 뜯어내는 일도 잦았다. 결국 홍콩 정부는 1950~60년대 한시적으로 사자춤을 금지시킨다. 하나 1970~80년대에는 쿵푸의 열풍이 사자춤의 성행도 함께 가져온다. 정부는 경찰에 허가증 신청을 통해 누구나 공중 장소에서 사자춤 및 용춤 공연을 할 수 있는 법령을 발표한다. 1980년대의 일이다. 용춤 - 용은 황제의 상징, 왜 백성들이 용춤을 출까? 용의 탈은 머리와 몸통, 꼬리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대나무 막대기로 받치며 움직인다. 용의 길이는 보통 10미터에 달해 건장한 청년들 수백 명이 공연에 참가한다. 신계 지역에서 향촌 및 종친 행사 등 경축일에 용춤이 등장한다. 용춤을 통해 평안함과 복을 기원하며, 바람과 비 등 자연의 조화로움도 함께 빈다. 자고이래로 중국에서 용은 황실과 민간의 숭배 대상이었다. 중국 황권의 상징이었고 백성들은 자신을 용의 후예라 여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의 즉위식, 영국 여왕의 홍콩 방문 때 용춤이 등장하였다. 홍콩인들은 결혼 25주년인 은혼식에서도 용무를 벌인다. 용춤도 사자춤과 함께 1950~60년대에 일시 금지되었다가 1980년대 법령을 통해 재개되었다. 추석 때 펼쳐지는 타이항과 폭푸람 지역의 화이어 드래곤 댄스(Fire Dragon Dance)가 유명하다. 이들 두 지역의 행사는 별도로 홍콩의 무형 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다. 비휴춤 - 마작, 카지노장에서 비휴춤을 추는 까닭은? 비휴(貔貅)는 중국 전설 속의 상서로운 괴수이다. 재물을 가져오며 집의 악귀를 몰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비휴탈의 길이는 12척 (3.6미터)이며 두 사람이 들어간다.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하며 용맹스러운 형상을 지녔다. 비휴춤(Pi Xiu Dance)은 생소한지라 유튜브에 들어가 동영상을 봤다. 사자춤 및 용춤과 비슷한데 탈의 머리에 뿔이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머리와 몸으로 나뉘어 두 사람이 들어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방식은 사자춤과 같다. 신의 탄신일, 카지노 및 마작을 즐기는 장소인 마작관의 개장 행사 때 비휴춤을 볼 수 있다. 카지노와 마작에 등장하는 이유는 비휴가 ‘적 세 명을 죽이고, 들어오는 것은 있으나 나가는 것은 없는(大殺三方,有入無出)’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비휴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 홍콩에서 공식적으로 선을 보인 것은 1972년 구룡 동산촌이었다. 이후 쳥차우, 사이쿵, 상수이 등 홍콩 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비휴춤은 합구(合口)와 개구(開口)의 두가지 형태로 나뉘어진다. 말 그대로 각각 ‘닫힌 입’과 ‘열린 입’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합구의 비휴춤은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개구 형태의 공연은 식당, 무도관, 마작관, 카지노에서 행해진다. 기린춤 - 청차우 빵축제 때 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기린(麒麟, Qilin)은 아프리카에 사는 목 긴 동물이 아니다. 전설속의 기린은 영험한 괴수이다. 용의 머리와 사슴의 몸, 말발굽과 소꼬리, 늑대의 이마로 이루어져 있다. 몸통은 다섯 색깔의 비늘을 지닌 모습을 보인다. 전설속의 기린은 길함의 상징으로, 재난을 막아주며 운을 트이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기린춤도 유튜브로 동영상 몇 개를 찾아보았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탈의 모습은 각기 달랐지만, 얼굴의 형태가 입체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기린의 탈 또한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며 각각 한 명씩 아래에서 조종한다. 명절, 혼례와 같은 경축일에 등장하는 것도 위에서 소개한 다른 전통춤과 같다. 단, 홍콩에서는 현지식과 객가족, 학로족들이 추는 세가지 춤의 형태가 존재한다. 기린춤은 홍콩의 대표적 지역 축제인 청차우 섬 빵 축제 행사에서 볼 수 있다. 민간에서 기린은 바람을 온화하게 하며 비를 다스린다고 전해지는 바, 어업에 종사하는 섬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때문이다. < 참고 자료 > 非物質文化遺産辦事處, 非物質文化遺産資料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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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이소룡은 영화를, 김용은 소설을 - 룽와 호텔약 3주 전 삼쟁으로 미식 여행을 다녀온 어느 날. 우리 학원 한국어반 홍콩 수강생들에게 다른 곳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거위구이의 고장이 삼쟁이라면, 광동 대표 요리 중 하나인 비둘기 요리로 유명한 곳도 추천해달라 한 것이다. 이때 소개받은 곳이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샤틴의 룽와호텔(龍華酒店, Lung Wah Hotel)이었다. 나는 곧 판링 역에서 내려 반대편 열차를 타고 샤틴으로 향했다. 투숙하며 글을 쓴 김용, 무예를 하며 영화를 찍은 이소룡 샤틴역에서 내려 좁은 길을 따라 가니 룽와호텔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입구에서 호텔로 향하는 길은 복도식 계단으로, 위에는 빨간색 연등이 줄지어 달려 있다. 그리고 계단 옆으로는 옛스러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룽와호텔은 다른 곳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원식 호텔이라는 것이다. 정원에는 티 테이블들이 놓여져 있고 옆에는 놀이터, 그리고 또 한편에는 마작을 즐기는 실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호텔 건물에 다다르자, 눈앞에는 특이한 풍경의 외관이 펼쳐진다. 20세기 초에서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한 건물 및 그 앞 마당의 모습은 마치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소룡의 ‘당산대형’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식당은 왼편에 위치한다. 식당 내부 역시 고풍스러운 느낌이 외관과 닮아 있다. 내 앞에 두꺼운 메뉴판이 놓여진다. 역사가 오래된 홍콩의 식당들은 메뉴판이 곧 작은 역사책이다. 이 호텔에 대한 역사와 특징을 소개한 글들이 메뉴와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우선 이곳의 대표 요리인 비둘기 요리를 주문했다. 한 마리에 98홍콩달러이다. 홍콩의 미식평론가 와이링은 샤틴에 3대 보물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산수이(山水)의 따우푸화(두부 푸딩), 밍포렝(明火靚)의 까이쭉(닭죽), 그리고 룽와의 비둘기 요리이다. 현재 룽와를 제외한 다른 두 곳은 없어졌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메뉴판을 들고 역사 공부를 한다. 이 호텔이 들어선 것은 1938년이다. 부호였던 쫑사우쳥 일가의 별장으로 지어졌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홍콩을 점령한 시기에는 일제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 호텔 본관이 총독부, 주변 일대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주둔했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1950년, 룽와는 비로소 호텔로 탈바꿈한다. 샤틴에 지어진 최초의 호텔로, 객실은 초창기 8개에서 이후 10개로 늘어난다. 당시 최고급 호텔이었던 바, 하루 객실료가 60위안이었다. 이는 일반인 월급의 절반에 달하는 액수였다. 유명인들도 룽와를 거쳐 갔다. 홍콩의 대표적 소설가 김용은 203호실에 장기 투숙하며 무협 소설 ‘서검은구록’을 집필하였다. 이소룡은 영화를 찍으며 틈틈이 무예 훈련도 했다. 이후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로 공사로 인해 홍콩 정부는 룽와호텔의 주차장 부지를 매입한다. 이어 소방 시설 미흡으로 객실은 영업 정지를 당한다. 결국 1985년을 기점으로 호텔업을 접고 지금은 식당만 운영 중이다. 비둘기 한 마리가 닭 아홉 마리를 이긴다! 메뉴판으로 룽와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 종업원이 비둘기 요리 접시를 올려놓고 간다. 머리 아래로 좌우 몸통, 양다리, 이렇게 다섯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다. 크기가 작아 2인분으로 적당하나, 한 명이 한쪽씩 맛본다면 4인분도 괜찮을 듯했다. 룽와호텔은 알에서 부화한 지 26일 이하의 비둘기를 재료로 사용한다. 룽와의 조리법은 걸어서 굽는 일반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겉은 바삭하지만 육질의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대신 끓는 물에 익힌 후 간장을 주원료로 한 러우수이 소스에 담가 양념이 베어들게 한다. 이후 겉에 맥아당을 발라 튀기는 순서로 제조한다. 한창 잘 나갔을 때는 하루에 6천 마리가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매일 약 6백마리의 판매량을 보이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마지막 홍콩 총독인 패튼, 대만 지앙칭구어 총통도 이곳의 고객이었다. 비둘기 요리는 영양가도 그만이다. 중국에는 옛말에 ‘비둘기 한 마리가 닭 아홉 마리를 이긴다’는 말이 있다. 담백질 함량이 15%에 달하며 소화율은 97%이다. 아연, 철, 비타민 A, B, E의 함량은 닭고기나 생선, 소고기보다 높다. 민간에서는 비둘기 고기를 보혈식품이라 하여, 빈혈환자의 건강 회복 식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고영양가 덕분에 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노약자, 신체 허약자, 수술 후 환자의 몸 보신용으로 적합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둘기 요리를 시식한다. 먼저 다리 하나를 들어 맛을 본다. 껍질은 전기구이 통닭같은 식감으로 바삭하다. 육질은 닭고기보다 밀도가 높아 쫄깃하다. 비리거나 역한 냄새는 전혀 없다. 다리를 끝내고 다음은 몸통이다. 살이 꽤 붙어 있었는데 역시 담백한 육질이 부드럽다. 비둘기 요리를 찾아 방문한 곳이 뜻밖에도 보물 같은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라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덕분에 오늘 글의 주인공은 애초 비둘기 요리에서 호텔로 바뀐 듯하다. 아무렴 어떠랴. 덕분에 기억에 남을 미식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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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용 변호사의 법률칼럼] Gambling Ordinance – 도박 조례대부분의 독자는 A식당의 행사가 ‘도박’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상인의 홍보행사로 생각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위와 같은 행사의 규모나 그 대상의 범위와 상관없이 광의에서의 도박으로 간주하고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도록 관련 법령을 통해서 규정하고 있다 (Gambling Ordinance – Cap. 148). 동 법령에서는 Gamble (도박)을 비롯하여 Lotteries (추첨) 및 Trade promotion competition (거래증진을 위한 게임)을 규정하고 있으며 당국이 발행한 허가 없이 동 행위를 한 자는 최고 HKD5,000,000 의 벌금과 7년 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A식당과 같은 중소 상인들이 흔히 저촉할 수 있는 행위는 ‘Trade promotion compet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정의는 “사업의 촉진을 목적으로 추첨 등을 통해서 상품을 나눠주는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게임”이라 하여 A식당과 같이 분점을 홍보하기 위하여 고객들에게 응모권을 나눠주고 추후 추첨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응모한 사람 중 일부에게 상품을 나눠준 경우라 하여 동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행사를 준비하기에 앞서 A식당은 행사를 시작하기 전 최소 2주 전에 Office of Licensing Authority (www.had-la.gov.hk) 에 행사에 적합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은 후, 비로소 행사를 시작해야 한다. 행사를 시작한다는 의미는 신문 등에 행사 관련 광고를 게재하는 행위도 포함되기 때문에 신문광고도 관련 허가를 취득한 다음에야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행사를 끝마친 이후에도 게임의 결과를 영/중 신문 각 1부에 게재하고 동 기록을 허가발급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게임결과 있은 후 10일 이내). 마지막으로 현금은 “상품”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응모자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A식당과 같이 상품목록에 현금이 포함되었다면 그 게임은 허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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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100년의 맛을 이어오다, 바로 이곳!한 음식이 100년 넘게 한결같은 맛을 유지하며 사랑받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이 바뀌기도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식당이 계속 영업을 유지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도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식당, 혹은 점포를 소개한다. 작가인 쉿게이는 홍콩에서 이들이 오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두가지 선결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가게를 임대의 형식이 아닌 매입 및 소유하는 것이다. 홍콩의 살인적인 임대료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현지 뉴스를 보면 오랜 역사를 지닌 유명 식당들이 폐업을 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두번째 조건은 가업 승계 의지이다. 힘든 일을 꺼려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가업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서양식과 중화풍의 만남 - 타이핑쿤 찬텡 타이핑쿤 찬텡(太平館餐廳, Tai Ping Koon Restaurant)하면 스위스 치킨윙, 비둘기 요리, 그리고 대형 수플레 빵이 유명하다. 그러나 나이가 든 세대들에게는 고급 양식집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 1백년 동안 홍콩의 수많은 고위직, 그리고 유명 인사들이 이 식당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간장, 소흥주, 얼음 설탕으로 만드는 일명 스위스 소스는 타이핑군의 상징과도 같다. 색깔만큼이나 짙은 풍미를 발산한다. 이름은 스위스 소스지만 스위스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래 전, 이곳을 방문한 한 서양인이 닭날개 요리를 먹으며 이름이 뭔지 물었다. 종업은 ‘스위트 윙(Sweet wings)’이라 말했지만, 잘못 전달되어 ‘스위스 윙(Swiss wings)’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이 요리에는 스위스 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나는 지난달 우리 학원 한국어반 학생들과 코스웨이베이 점을 방문하였다. 내부 인테리어는 약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 고풍스럽고도 고급스러웠다. 재미있는 것은 그날 먹은 스위스 윙, 비둘기 구이, 꼰챠우응아우허(乾炒牛河, 소고기 볶음면)가 모두 스위스 소스로 조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스가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려 모두 맛있었다. 사람 머리만한 크기로 나오는 프랑스빵 수플레는 타이핑군의 디저트 필수 메뉴이다. 홍콩에 네 곳이 운영 중인데, 가장 오래된 곳은 1860년에 문을 연 조던점이다. 타이핑군의 특징은 컨트롤 타워라 할 수 있는 중앙식 키친 운영을 포기하고, 각각의 지점에서 그때그때 직접 조리하여 신선한 상태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대신 총책임자나 수석 셰프가 지점들을 돌며 맛을 관리하고 있다. 주소: G/F, 12-21, Mau Lam Street, Jordan 주윤발도 단골, 미슐랭 ‘꼭 맛봐야 할 길거리 음식’ - 꽁워 따우반청 꽁워(公和,Kung Wo)는 가게 이름이고 따우반(荳品)은 콩을 원료로 한 제품이란 뜻이다. 마지막 글자인 청(廠)은 제조장을 가리킨다. 여기서 만들어내는 것은 따우졍, 따아푸화, 찐영따우푸이다. 따우졍은 콩국인 두유, 따우푸화는 두부 푸딩이다. 찐영따우푸는 두부지짐인데 길거리 음식이다. 이 가게의 출발점은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캔톤 로드에 자리잡았으나 1950년대에 지금 위치한 삼수이포로 이전하였다. 원래 카우룬 시티에도 가게 한 곳이 운영되었지만 아쉽게도 2020년에 문을 닫았다. 맷돌로 갈아 생산하는 두부는 100년이 넘도록 같은 맛을 유지하고 있다. 기계화로 생산되는 일반 업체와는 달리 꽁워는 수공업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2016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꼭 맛봐야 할 길거리 음식점’으로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렸다. 주윤발도 이곳의 단골 손님으로 알려졌다. 주소: 118 Pei Ho Street, Sham Shui Po 푸위 비빔밥의 추억 - 리우마키 푸위 삭힌 두부인 푸위(腐乳)는 홍콩인들에 추억의 음식으로 남아 있다. 식료품과 물자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가족들은 밥과 함께 푸위를 나누어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일반적인 푸위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cm, 두께는 1.5cm이다. 특히 반찬이 없을 때 밥과 함께 비벼 먹곤 했다. 품질이 좋은 푸위는 밥에 비벼 먹고, 하급은 야채에 볶아 먹었다. 우리 학원의 한국어 수강생 육링 씨는 지금도 가끔 푸위에 밥을 비벼 먹는다고 한다. 지금은 보통 ‘푸위 차우 통초이(모닝글로리 볶음)’ 같은 음식에 넣어 조리된다. 홍콩 사람들에게 ‘푸위’하면 떠오르는 상표가 있다. 리우마키(廖孖記, Liu Ma Kee) 푸위이다. 1905년에 개업하여 오늘날까지 콩 가공품의 유명 메이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현재 3대째 걸쳐 운영중이다. 야우마테이에 자리 잡은 라우마키는 점포를 소유하여 임대료에 대한 부담은 없다. ‘라우마키 빌딩’이라는 이름의 상가를 소유한 건물주인 것이다. 예전에는 아래층에 점포를 두고 윗층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고객들이 영업 시간 후에는 집으로 찾아와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잦자, 주거지를 빌딩 밖으로 이전하였다. 오늘날 푸위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많지만 백 년 넘도록 수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곳은 리우마키가 유일하다. 주소: G/F, Liu Ma Kee Building, No.1 Min Street, Yau Ma Tei < 참고 자료 > 『香港百年』,雪姬著,創意市集,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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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현 목사의 생명의말씀] 계속 채워지는 원리한 나라에 가뭄이 심했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합니다. 아들 한 명과 같이 사는 과부도,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나마 남은 곡식을 겨우 모아 음식을 만들어먹은 뒤에는, 굶어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남자가 찾아와 이렇게 요구합니다. “내가 지금 목마르고 배고프니, 물과 먹을 것을 주시오” 황당한 요구에, 여인은 대답합니다. “우리도 겨우 한 움큼 가루하고 기름 조금 있는데. 이것으로 음식 만들어 먹으면 이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남자는 굽히지 않고 말합니다. “그것이라도 먹을 것 만들면, 나 먼저 주시오. 내가 먹고, 당신과 아들도 먹으면 되지 않겠소?” 건방지고, 뻔뻔하고, 몰염치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는 더 나아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당신 그릇에 먹을 것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 여인은 남자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었고, 남자를 주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릇에 가루가 또 채워졌습니다. 기름이 또 생겼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 8-16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계속 채워지는 원리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두 가지 원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는, 계속 채워지는 원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채우는 원리입니다. 채워지는 원리는, 계속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용하고 나면, 그것이 또 채워집니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기도, 물도, 공기도 사용하는 만큼 계속 채워집니다. 자기가 채우는 원리는, 채워지는 것이 없기에 자신의 힘으로 계속 채우며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채우기 위해 애써도, 많이 채우지 못합니다. 그나마 채운 것도 금방 떨어집니다. 우리는 24시간이 지나면, 내일 또 24시간이 채워질 것을 압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숨 쉬면서, 공기가 계속 채워질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채워지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 변함없이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힘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재난 경보가 발령되면, 사람들은 음식과 물, 비상용품을 사재기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게 필요한 물품이 계속 채워지리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사재기로 물건을 비축해두어도, 1년, 2년, 10년 분을 쌓아둘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계속 공급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채우는 원리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전기차 충전 중 불이 났습니다. 화재로 인해 전기와 수도 시설이 망가졌습니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 더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에 물이 없으니 위생에 문제가 생깁니다. 급수차를 통해 물 배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물을 받아도, 그 물을 들고 20층 아파트를 계단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계속 공급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사고로 인해 물과 전기 공급이 중단되자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채워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채워도, 비축한 물은 금새 바닥납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채우는 것은 힘듭니다. 내가 채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채워져야 합니다. 서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나도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앞서 예를 든 성경 말씀도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과부도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배고프다고 하는 남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게 음식을 나눠줍니다. 그 결과, 그릇에 먹을 것이 계속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가” 먹을 것만 쌓아두면 풍족해보이지만, 결국 다 소모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배고픈 남을 생각하고 “타인을”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면, 부족했던 음식이 채워집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것을 움켜쥐며 살기 쉽습니다. 나도 먹을 것이 없고, 나도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 더욱 가치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기억하고, 채워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채워지는 원리를 경험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을, 재화를 어려운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보십시오. 내 것을 움켜쥐고 사는 것과는 다른 삶이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각자 자기 배를 채우며 살기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채우며 살기 원하십니다. 홍콩우리교회도 이 원리에 따라 살기 원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홍콩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언제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번 한 주도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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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미식 여행 – 거위구이의 고장 삼쟁지난주 게재된 광동식 비비큐 구이 ‘시우메이’ 칼럼을 준비하며 알게 된 지역이 있다. ‘삼쟁(深井)’이라는 곳으로 거위구위의 본고장이다. 위치가 췬완(荃湾)에서 가깝다. 공항에서 시내 방향으로 청마대교를 건너오면 왼쪽 멀리 보이는 곳이 삼쟁이다. 지난 주말, 본 칼럼을 위해 미식 여행을 떠났다. 공업도시로 융성했던 삼쟁 삼쟁은 광동에서 이주해 온 치우자우(潮州 조주)인과 하카(客家 객가)인이 집단 거주를 해온 촌락이다. 수심이 깊은 부두를 끼고 있어 해상 교통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육로 수송도 편리하여 공업의 융성을 가져왔다. 산 미구엘 맥주 공장, 카우룬 밀가루 공장, 가든 제빵 공장 모두 이곳에 위치하게 된 이유이다. 전성기에는 약 4천 명이 마을에 거주했고, 그중 대다수는 이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사업 수완이 있는 치우자우인들은 주변에 가게와 상점을 열며 마을의 번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오늘날 홍콩 사람들이 ‘삼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거위구이이다. 80년대에는 ‘삼쟁에 가서 거위구이를 즐긴다(去深井,食燒鵝)’는 말이 유행하였다. 나는 삼쟁이라는 곳에 대해 두 가지 착각이 있었다. 거위 집단 사육 농장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두 번째로는 마을 이름이 깊을 ‘심(深)’에 우물 ‘정(井)’이니 이곳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나 이 추측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깜종(金鐘, 어드미럴티)에는 금으로 만든 종이 없고, 첵취(赤柱, 스탠리)에는 붉은 기둥이 없으며, 다이아몬드힐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다. 알고 보니 삼쟁은 거위를 굽는 방식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거위를 굽기 위해 좋은 토지를 골라 땅을 깊게 판다. 이는 ‘마른 우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라이찌 가지를 쌓아 올린다. 우물 입구에는 철근으로 덮는다. 그리고 거위는 그 위에 걸어 굽는 식이다. 광동의 별미 거위구이 한국의 경우 오리고기는 흔하지만 거위고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의 거위구이도 실은 오리구이에서 유래 되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도 거위 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동의보감에는 우리 선조들은 거위를 많이 길렀고 식용으로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과 홍콩 외에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거위 요리가 대접을 받고 있다. 프랑스는 고기 외에도 거위간 요리인 푸아그라가 유명하다.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거위를 통째로 구워 먹는 로스트구스(Roast Goose)가 보편적이다. 거위는 맛이 부드럽고 담백한 데다가 영양가도 최고다. 단백질, 지방, 비타민B, 미네랄 등 풍부한 영양을 자랑한다. 육체 노동이 많은 사람에게 기운을 보충해주고 근육과 조직을 만들어준다. 또한 오장의 열을 풀어주어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의 몸을 보호하며 갈증을 멎게 하는 효능도 지녔다. 노년층의 보양식으로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몸에 좋다고? 그럼 어서 먹으러 가 볼까~ 미슐랭 거위구이 식당 – 삼쟁 위끼 로스트구스 삼쟁에는 유명한 거위구이 맛집이 있다. 위끼 로스트구스(Yue Kee Roast Goose)라는 식당이다. 치우자우인인 응췬임이 1958년 문을 열었다. 2010년부터 미슐랭 가이드에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번 미식 여행의 목적지이다. 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칭이 지하철 역에서 내려 A1출구로 나가면 상가와 연결된다. 상가 입구 아래에 미니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308M버스를 타고 약 10여분 후 3번째 정류장인 캐슬피크(Castle Peak)로드에서 하차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마을 건너편으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그 위로 웅장하게 걸쳐진 청마대교가 보였다. 동네 곳곳에는 바비큐 거위를 의미하는 ‘燒鵝’ 간판의 식당들이 눈에 띈다. 원래 이 마을을 상징하는 거위 모형의 마스코트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몇 년 전 철거되었다. 위끼 레스토랑은 마을 중심부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식당 입구에는 미슐랭 훈장이 8개나 달렸다. 식사를 즐기는 공간은 윗층으로 올라간다. 벽면에 홍콩의 영국의 마지막 총독 페튼이 방문한 사진이 보였다. 메뉴에는 거위 한 마리, 반 마리, 그리고 1/4 크기의 레귤러가 금액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나는 레귤러 사이즈(HK$170)를 주문했고 밥은 따로 시켰다. 약 10여분 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거위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표면에는 반지르르한 기름이 흐르며 바삭한 식감을 시각으로 먼저 전달했다. 그 안쪽으로는 두툼하고 촉촉한 육질이 모습을 숨기고 있다. 겉으로 보면 기름지고 짜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먹어봐야 알 수 있다. 한 마리의 1/4 크기였지만 혼자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이다. 먹는 내내 입은 즐겁고 몸은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미식 여행은 먼 여정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 주었다. 홍콩 도심에서도 거위구이를 즐길 수 있다. 유명한 식당으로는 완차이에 위치한 캄스 로스트 구스(Kam’s Roast Goose), 센트럴의 얏록(Yat Lok Restaurant)이 있다. 여름의 한복판에 있는 요즘, 현지 미식 체험과 함께 건강도 챙기는 시간을 가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