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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악수부터 악명 높은 '발통증' 사임까지"… 홍콩 첫 행정장관 퉁치화가 남긴 격동의 8년

기사입력 2026.09.0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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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쩌민 악수부터 악명 높은발통증 사임까지… 홍콩 첫 행정장관 퉁치화가 남긴 격동의 8년.jpg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난 홍콩의 첫 행정장관 퉁치화(Tung Chee-hwa)는 재임 8년 동안 주요 정책 추진과 수많은 논란을 남기며 홍콩의 현대사를 격동 속으로 이끌었다.


    기업인에서 행정장관으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의 정치적 커리어는 1992년 크리스 패튼(Chris Patten) 당시 홍콩 총독이 그를 행정회의 위원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1996년 1월, 장쩌민(Jiang Zemin)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베이징에서 홍콩 특별행정구 준비위원회 위원들을 만났을 때 퉁치화 전 행정장관과만 유일하게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사진에 포착되었고, 이는 그의 출마에 대한 베이징 당국의 지지 신호로 널리 해석됐다.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홍콩의 첫 행정장관으로 당선되어 1997년 7월 1일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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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정책과 논란

    퉁치화 재임 기간에는 수많은 야심 찬 사업이 추진됐다. 그의 1997년 정책연설에서는 연간 8만 5,000가구의 주택 건설을 제안했으나, 아시아 금융위기로 주택 가격이 폭락하면서 많은 주택 소유자들이 깡통주택(부채가 자산가치를 초과하는 상태) 위기에 처했다. 2000년 6월, 그는 '8만 5,000가구 주택 정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1999년, 본토 출생 자녀 약 167만 명에게 거주권을 부여하는 종심법원의 판결이 내려지자,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이 거주권 문제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로 이관하여 법적 해석을 요청했다. 이 해석으로 인해 자격은 적출자로 제한되었고 자격 대상자 수는 약 2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또한 2002년 장관급 문민 고위공직자 책임제를 도입하여 전통적인 공무원 모델을 정치적 임명직으로 대체했다. 이 제도로 인해 앤터니 렁(Antony Leung) 재무장관이 자동차 편법 구입 스캔들로 사임하고, 양영강 위생복지부 장관이 사스(SARS) 사태 여파로 사임하는 등의 파장이 있었다.


    2003년, 기본법 제23조에 따른 국가안보법 제정을 추진한 퉁치화 전 행정장관의 정책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으며, 7월 1일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행진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9월에 해당 법안을 철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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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임과 만년

    사스 사태와 제23조 법안 파동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 후,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2004년 12월 후진타오(Hu Jintao) 국가주석으로부터 과오를 되돌아보라는 공개적인 지적을 받았다. 2005년 3월 10일, 그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취재진에게 그 유명한 '발통증'을 언급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틀 후 국무원이 그의 사임을 승인했고, 그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 전국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됐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퉁치화 전 행정장관은 2014년 '우리홍콩재단(Our Hong Kong Foundation)'을 설립하고 알리바바 그룹의 독립사외이사로 재직하는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건강 문제로 인해 대중의 시선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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