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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의 의거가 있기 전 꼭 10년 전인 1841년 1월은 영국의 브레머 제독(Commodore Bremer)이 지금의 상환 포세션 포인트(점령각)에 유니온 잭크 기를 꽂은 때다.
그 당시 홍콩에 거주하던 중국인은 가난한 石工, 영국 군함에 신선한 야채며 과일을 공급하며 떠 다니는 가게(艇戶) 그리고 짐을 나르는 苦力 정도였다. 광동·광서지방에 일어난 太平天國의 난은 그곳에 평화롭게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던 토착지주와 大商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은 가진 돈을 황금 등으로 바꾸어 자유무역항인 홍콩으로 평화와 자유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홍콩에는 처음으로 돈 있고 배움이 있는 중국인이 거주하기 시작하게 되고 이것이 홍콩발전에 일대 전환점이 된다.
대륙에서 돈을 가진 지식인이 홍콩의 자유항에 몰려들면서 홍콩에서는 중국인의 고정 이미지와 위치를 바꾸어 놓게 된다. 그들은 상환을 중심으로 가게를 내기 시작했다. 중국대륙의 물산을 수집하여 당시 華僑들이 흩어져 사는 태국, 버마 등 동남아시아로 공급하는 중계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홍콩에서는 이러한 무역을 南北行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북쪽(北)과 동남아시아 등 남쪽(南)을 중계하면서 장사(行)를 한다는 의미이다.
홍콩의 南北行은 한 때 500개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1848년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중국인들이 켈리포티아 황야의 막노동꾼(苦力)으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1849년에는 미국의 黃金狂들이 몰려드는 이른바 골드러쉬, 포티나이너들의 해였다.) 홍콩은 이러한 쿠리(苦力)를 공급하는 인력수출의 중심이 되었고, 이 苦力들의 식생활 보급기지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홍콩의 중국인에게는 聖 프란시스코라는 어려운 이름의 성스러운 도시라기 보다는 하나의 황금의 산(金山)으로 보였다. 한 때 홍콩을 거쳐 金山에 보낸 苦力은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홍콩의 부호 중에 젊을 때 금광광부가 되어 金山으로 갔다가 급여를 꼬박꼬박 저축하여 홍콩으로 들아와서 巨富를 이룬 분이 있다. 지금 코즈웨이 배이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던 리 가든 및 리 씨에터(舞臺)의 주인이었던 利希愼의 아버지가 바로 광부출신이었다.
미국의 金山에 이어 지구 남반부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근처에서도 1852년에 금광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홍콩의 중국인에게는 또 하나의 金山이 생긴 것이다. 홍콩은 오스트레일리아 金山에도 쿠리를 공급하고 쿠리에게 필요한 식품을 보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묵은 금산의 뜻으로 舊金山이라 부르고 시드니는 새로운 금산의 뜻으로 新金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일부 홍콩사람들은 옛날의 추억 속에 두 도시의 이름을 新·舊金山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제 南北行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신·구 金山에 苦力을 위한 식품공급을 맡기 시작했다. 이러한 金山전문의 중계무역업체를 金山莊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많이 쇠퇴하고 없어졌지만 아직도 상환의 중국상인들의 가게이름에 隆, 昌 등의 글자가 있는 것은 당시 南北行이나 金山莊의 가게라고 보아도 틀림없다.
의화단의 난과 新移民(제2波)
중국(淸)은 문자 그대로 內憂外患의 형상이었다. 밖으로는 영국에 당하고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을 치룬 후여서 마치 중환자 같은 처지였다. 유럽 열강과 일본은 병든 제국 청을 그냥 두지 않는다. 중국은 하나의 거대한 피자이고 유럽열강과 일본은 피자를 잘라 나누어 먹으려는 형국이었다. 양쯔강 연안과 해안가 도시는 서방의 식민지 도시로 전락한다. 뜻 있는 중국인은 반 외세를 주장하게 되고, 당시 산동지방에 있던 중국 고유의 拳法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술집단은 이러한 반 외세 세력을 규합한다. 수십년 전 태평천국이 기독교 철학을 끌어넣은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외세 및 기독교 세력을 배척한다. 義和拳으로 알려진 이 권법은 宋나라 초기 무사들이 實戰이 줄어듦에 따라 훈련부족을 느끼고 스스로 實戰을 상정하고 주로 주먹을 사용 힘을 기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실제 사람을 치는 것이 아니면서 마치 치는 것과 같이 전력을 쏟는다.
어찌 보면 혼자서 권투 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판토마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매우 진지하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shadow boxing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의화권(의화단)의 난을 박서(boxer)의 난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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