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봉사? 쥐뿔도 없을 때, 개뿔도 모를 때 시작해야 - 손정호 편집장

기사입력 2025.12.17 15:47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글 손정호 편집장


    (이 글은 2014년 7월 23일 수요저널에 게재한 글입니다. 한인 사회에 봉사하러 나오셨다는 몇몇 분들이 봉사 경력도 없이 용감하게 활보하시고, 사진 찍는 데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에 에둘러 쓴 글이었습니다. 10년도 훌쩍 지났으니 이젠 이런 글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드려야 할까요?)



    대학 시절 나의 부끄러운 단상을 고백하려 한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나에겐 세상과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엄청난 경험이었다. 부끄럽지 않다. 내겐 절실했었고, 그 이상의 결과를 준 일이다.

     

    밀레니엄을 앞둔 겨울쯤. 대학 내 멀티미디어센터의 영상취재팀장, 신문방송학과 영상조교, 방송동아리학회장 등 1인 3 역할로 분주하던 시기였다. 학기 말 학점까지 1등이었다. 근로장학금 대신 전액 성적 장학금을 선택했다. IMF 금융위기와 취업대란, 많은 학생이 휴학하던 어려운 시기에, 나는 여러 면에서 칭찬받았고,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다.


     그때 우연히 대학생 국제 봉사단 모집 공고를 봤다. 200여 명의 학생들을 선발하는데 여러 국가와 봉사 분야가 있었다. 나는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이용한 영상 기록 부문으로 지원하고, 한국보다 더 춥고 광활한 러시아를 택했다. 그리고 센터 소장 교수님의 추천을 받고 대학 총장님의 추천장도 1순위로 받았다. 당시 전국 대학이 160여 개였으니, 각 대학에서 최소 1명만 선발해도 나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러시아 대륙을 밟을 꿈을 꾸며 어떤 영상을 담을 수 있을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학교 친구들이 부러워할거라 생각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나서 결과가 나왔다. 소장 교수님도, 간사 선배님도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탈락이었다! 학생 세 명이 총장님의 추천서를 받았는데 세 번째 순위 여학생이 발탁되었다. 3순위가? 어떻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는 내가 탈락한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봉사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한마디에 고개를 숙였다. 봉사 정신은 없이, 그저 미지의 땅으로 이국적인 체험만을 기대하고 있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았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는 봉사하려는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해외여행' 준비 상태였다. 희생보다 욕망으로 가득했었다. 탈락이 당연한 것이었다.

     

    image-gen (1).jpg


    그 후 봉사 경력을 쌓아 다음 해를 기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시청에서 운영하는 자원봉사센터를 찾아가 보았다. 자원봉사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일이었다. 좀 더 역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또 다른 자원봉사센터를 찾았다. 독거노인들을 위한 영정사진을 촬영한다는 구청 복지관이 있어 어른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나중에는 각 구청 사회복지사끼리 소개를 해서 나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몇 달에 한 번씩 영정사진 촬영 봉사를 계속했다. 또 성당에서 운영하는 장애 보육원에 찾아가 사진 봉사로 참여했다. 방송동아리 후배들을 다시 데리고가 대학 수업에서 배우지 못한, 진실하고 소중한 경험도 함께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로 갈 꿈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나는 봉사 자체에 대한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이국적 체험이 아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이웃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시청과 구청의 자원봉사센터를 찾아갈 때의 심정은 봉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죄책감을 만회하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봉사에도 약간의 종자돈은 필요했다. 필름과 인화비용은 내 돈으로 먼저 정산 후에 받을 수 있었다. 수동카메라와 렌즈, 라이트 등 촬영 장비 마련은 내 몫이었다. 중고 렌즈는 고사하고 필름값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봉사의 손길에는 신(神)이 함께 하는 것 같다.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 수록 내 돈은 거의 들지 않고, 도리어 단체와 기업이 후원을 나서 나를 찾았다. 나로서는 단지 시간과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쥐뿔도, 개뿔도 없는 상태였지만, 더 큰 칭찬을 듣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리고 인생의 교훈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기회가 됐다. 


    그 후 2001년 김좌진 국토대장정 여행을 통해 중국 동북 3성과 백두산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고, 그다음 해는 홍콩과 마카오까지 선교여행으로 방문했다. 그게 인연이 돼서 대학원 졸업 후 홍콩에서 일을 시작했고 현재 수요저널에 몸담고 있다.

     

    ‘나중에 좀 더 안정되면 봉사해야지’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와 인생의 경륜이 더 쌓인 그때 봉사하려 나선다면... 그때는 봉사 내용보다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 괜찮은 봉사 자리인지 의식하게 된다. 게다가 돈 있는 중년들이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무슨 자리 올랐다며 손 내미는 어색한 미소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봉사는 아무것도 없을 때가 봉사하기 좋은 시기다. 성장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