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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달력에는 참으로 잔인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지난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매년 이날은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나누는 온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풍성한 식탁, 그리고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락함으로 채워져야 하는 날이다. 홍콩에서도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는 사람들에게는 숨 가쁜 한 해의 질주를 잠시 멈추고 가족들이 모여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들을 함께 하나하나 헤아려보는 쉼표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식탁에서 가족과 둘러앉아 감사의 이유를 하나 둘 꼽아보고 있던 바로 그 시각 타이포(Tai Po)는 죽음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왕푹코트(Wang Fuk Court)를 집어삼킨 그날의 화염은 단순히 대나무 비계와 초록색 그물망만을 태운 것이 아니었다. 그 화염은 우리 삶을 지탱하던 안전이라는 믿음, 그 견고해 보이던 껍데기를 홀라당 태워버렸다. 가정의 신성함을 기려야 할 날에 우리는 집이라는 안식처가 거대한 장작더미로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그 참혹한 광경은 이제 흉터처럼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리모델링을 위해 초록색 옷을 입고 있던 아파트 타워들이 거대한 횃불이 되어 타오르던 모습, 천 명이 넘는 소방관들의 사투를 비웃기라도 하듯 건물을 감싼 그 ‘초록 코트’가 도리어 맹렬한 불쏘시개가 되어 지옥불을 키우던 모습, 그 앞에서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울부짖던 사람들의 그 기막힌 모습 말이다.
우리는 연말이면 명절의 ‘따스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난주 그 단어의 무게는 납덩이처럼 무겁고 서늘했다. 수백 명의 이웃들이 자신의 거실에 갇혀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을 그 살인적인 열기를 생각하면 가족과 둘러앉은 저녁 식탁의 온기를 논하는 것조차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단 한나절 만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해 울지 않고서 어찌 내 머리 위에 온전한 지붕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겠나.
이 비극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은 그 시작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선한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곳은 개보수 공사 중이었다. 주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특히 그곳에 많이 사시는 노인들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시작된 돌봄의 현장이었다. 허나 보금자리를 새롭게 단장하려 입혔던 옷이 도리어 그 터전을 불사르고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몬 파괴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삶의 질을 높이려던 약속이 삶 자체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이 비통한 역설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들려오는 사망자와 실종자의 숫자, 혼란 속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의 절규를 마주할 때 우리가 쥐고 있는 감사의 제목들은 너무도 가볍고 또 무거워진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염치로 식탁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고개를 숙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하고 경건한 반응은 애써 외면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 참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왕푹 코트의 화재는 추수감사절을 감싸고 있던 화려한 포장지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서늘한 진실을 일깨운다. 진정한 수확은 식탁 위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이 아니라 그 식탁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의 체온이라는 사실을. 또한 안전이란 당연히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 누리는 과분한 특권임을 말이다.
이 참담한 상실 앞에서 우리의 감사는 그 결을 달리해야 한다. 이제 감사는 단순히 배부른 만족감에 젖어 있는 수동적인 감정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 대한 치열하고도 적극적인 경외가 되어야 한다. 층간 소음을 일으키는 이웃에 대한 짜증,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소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어제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그 소박하고도 기적 같은 일들에 대해 사무치게 전율하며 감사해야 한다.
**타이포의 주민들과 왕푹코트의 화마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가장 평화로워야 했을 날에 가장 끔찍한 혼돈과 비명을 마주해야 했던 우리 이웃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전합니다. 누군가의 밥상이 엎어진 자리, 그 불빛이 사라진 홍콩의 밤은 어제보다 더 어둡고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의 소중함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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