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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도 홍콩은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땅이 되었다

기사입력 2006.01.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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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보1배 행진으로 홍콩시민들의 성원을 얻어냈던 한국농민투쟁단들은 시위 종료 이틀을 남겨둔 17일, 홍콩경찰에게 집회장소를 컨벤션센터와 더 가까운 반환기념탑공원으로 보내주면 평화적 시위를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묵살당한다. 그래도 한국농민투쟁단은 컨벤션센터로의 집입을 시도했고 경찰의 저지선은 의외로 쉽게 뚫렸다. 이 시각, 홍콩경찰은 도로와 크로스하버터널을 봉쇄하고 홍콩시민들과 시위대를 분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홍콩경찰은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도 15년 넘게 사용하지 않고 있는 최루가스를 쏘고 고무총을 쏘아 시위대에게 부상을 입혔다. 홍콩경찰의 과도한 무력사용은 국제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홍콩 전역에서는 이원 생중계 등의 방법으로 시위장면을 계속 내보내고 있었고 각 MTR역과 KCR 플랫폼에서는, 완차이로 가는 하버가 통제되었으니 그쪽으로 가지 말 것을 종용하는 특별안내방송이 나왔다. 시위대를 체포하겠다는 홍콩경찰의 분위기가 이렇게 잡혀가고 있었다. ]]2]] 토요일 밤 9시에 시작된 체포는 그 자체가 악몽이었다. 처음에 체포된 사람들은 포승줄에 상반신이 묶였고 포승줄이 모자라자 수갑을 채웠고 또 수갑이 부족하자 플라스틱 줄을 사용해 손을 뒤로 묶어 수갑을 대신했다고 당사자들은 증언한다. 한국시위대들이 손이 뒤로 묶이는 것에 항의하고 저항하자 손이 앞으로 묶였다. 반미여성회 김진의씨는, “한국에서는 중범죄가 아니면 포승줄이나 수갑을 사용하지 않는데 집시법 위반자에게 수갑을 채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부터 이루어진 체포는 근 14시간에 걸쳐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이 경찰차나 도로에서 장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라북도에서 온 유재흠씨는 도로에서 밤을 보내면서 추위 속에서 타국 경찰에 잡힌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도로 위에 사람들을 억류하면서 공중화장실도 못 가게 해 하숫가를 임시화장실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손이 묶여 있어 옷을 내리기도 힘들었다는 증언이다. 18일 일요일 아침 일부 지역에서는 식사라고 하면서 빵을 농민들에게 던져주어 농민들은 사람에게 음식을 던지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식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한 사람씩 연행되기 시작한 사람들은 뿔뿔이 경찰서와 이름 모를 곳으로 옮겨져 구금되었다. 9개의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었다고 하였으나 홍콩민중연대에서 급히 무료변론을 위해 구한 변호사들과 찾아간 경찰서에는 많으면 20명 적게는 10명 미만의 사람들이 있어 어디에 사람들이 있는지 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급하게 전화를 받거나 수요저널 광고를 보고 달려 나온 한국인 자원 통역자들은 새벽까지 대가없이 홍콩변호사가 하는 영어나 광동어를 한국말로 통역하며 동포애를 보여주었다. 변호사와의 면담에서 구금자들은 추위에 떨면서 도로에서 밤을 지샌 것과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의 격리에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어려움 등을 호소했다. 혈압약과 평소에 상복하던 약들을 숙소에 두고 나와서 약이 필요하지만 병원에도 보내주지 않아 괴로웠다고 한다. 한 자원봉사자는 로우 국경 안에 있는 산옥랭 구금장에 한국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도착할 때까지도 몇 명이 구금중인 줄 몰랐다고 한다. 그 정도로 홍콩경찰은 사람들의 신변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공개하지 않았다. 로우 산옥랭 구금센터는 홍콩과 중국의 국경지역으로 241명이라는 숫자가 잡혀있었다. 좁은 공간에 많게는 20명이 넘게 앉아서 잠을 자야했고 3일 동안 손에 물을 묻혀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한국투쟁단은, 체포가 시작되었을 때 더욱 심하게 반항할 수도 있었지만 홍콩시민들의 반응을 의식했었고, 일단 한 사람이라도 체포되면 전원이 다 체포되는 것으로 결심한 터라 전원 연행되는 데 순순히 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인권침해의 사안들이 벌어져 당혹스러웠다고 전한다. 구금자들의 인권보호는 홍콩이 한국보다 열악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19일 월요일, 대한민국 외교부 차관보가 급히 홍콩으로 들어오고 본국에서 관심이 고조되자, 만 48시간 안에 구속자와 훈방자를 가려야 하는 법에 따라 한국과 홍콩은 체포 시점을 두고 만 12시간의 차이를 보이며 줄다리기 끝에 이 날 저녁 9시반경, 1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석방됐다. 19일부터 22일까지 꾼통법원 앞에서는 단식과 3천배의 기도가 이루어졌고, 소고백화점 옆에서는 홍콩민중연대 주최로 구속자석방촉구 촛불집회가 진행됐다. 전남순천농민회 이광천씨가 단식을 했고, 이를 지지하는 홍콩시민과 대학생의 단식이 뒤따랐다. 22일 소고백화점 옆에서 있었던 촛불집회에서는 100여명의 홍콩인들이 모여 구금돼있는 한국투쟁단의 석방을 촉구하며 모금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전농은 급히 준비한 슬라이드와 함께 <농민가>와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을 배경음악으로 틀었고, 시민들은 이 노래에 맞춰 박수로 장단을 맞추었고 지나가던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었다. 광고업을 하는 마이클은 자발적으로 집회에 나왔다면서, “한국농민은 정당한 시위를 하였고 내 생존권이 위협 받는다면 나도 역시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농민이 WTO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알게 되었으며 경찰이 무리한 무력을 사용해 한국인에게 미안하다며 지지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전농의 이영수 대외협력국장과 홍콩민중연대의 메이블은 그 간의 협력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과도한 투쟁으로 홍콩민중연대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한국측의 사과에 대해 홍콩민중연대는,“이런 과정을 통해 홍콩민중운동이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대꾸했다. 1500명의 한국투쟁단은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단체였으나 국제투쟁 속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홍콩민중연대 측의 솔직한 속마음이다. 그 간 홍콩에 남아 추이를 지켜보던 전농팀은 불구속기소로 석방된 동료들과 함께 23일 저녁 모두 한 많은 홍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타이완, 일본, 중국 각각 1인과 11인의 한국인은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지만 30일에 있을 범인식별절차(identification parade)를 앞두고 섹킵메이에 있는 중국교회에 머물고 있다. 김은주(홍콩민중연대 자원봉사자) eunjuke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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