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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 홍콩우리교회 서현 목사2011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발표된 노래 중 “말하는 대로”라는 곡이 있습니다. 유재석/이적의 이 노래는, 유재석 씨의 자전적 내용을 담아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곡의 가사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 믿어보기로 했지 /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 고갤 끄덕였지 말하는 대로 그 일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또 하나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계십니까?” 같은 것을 보고 말을 해도, 어떤 분은 기분 나쁘게 말합니다. 어떤 분은 기분 좋게 말합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보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은 상황 속에서도 일부러 안 좋은 것만 보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으십니까? 사람들은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마음에서 말이 시작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에 대해 더욱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말씀으로 나올 때 실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원리는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자기 계발의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믿음과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 말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홍해가 막고 있을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걷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만나를 주시며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동하며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정탐꾼의 이야기가 다릅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은 “거기 사는 사람들은 거인이다. 우리는 다 죽겠다”라고 합니다. 두 명은 “그 땅은 너무 좋은 땅이다. 그들은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열 명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두 명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왜 돌아가는가? 그곳을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시 매 맞고, 대를 이어 노예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해주셨는데, 약속의 땅을 주셨는데, 왜 다시 돌아간다고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낯선 천국보다는 익숙한 지옥을 더 좋아합니다. 습관적으로, 내가 아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과 낯선 길을 하려 하지 않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말 한 것을 내가 다 들었다. 너희가 말 한 그대로 내가 너희에게 하겠다.” 구약성경 민수기 14장 28절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나의 귀에 들리도록 말한 그대로,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하겠다.”(민수기 14:28. 새번역성경)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결국 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다 죽겠다’라고 한 사람들은, 결국 광야를 떠돌다 죽었습니다. ‘그곳에 들어 가겠다’라고 한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말 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인터넷 댓글 하나, 가까운 이에게 내뱉는 한 마디가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일인데도 ‘죽겠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 주위에는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돌아보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배드리며 확인합니다. 욕하고 저주하고 이간질하는 말들이 바뀌기를 기도합니다. 축복의 말, 사랑의 말을 하기 위해 힘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의 삶에도, 항상 좋은 언어와 사랑의 언어가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언어부터 달라지며, 새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홍콩우리교회 성도 모두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섬기기 원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주는 모임이 되기 원합니다. 저희는 매주 함께 모여 서로의 말과 마음을 점검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치유와 격려의 도구가 되도록 서로 돕고자 합니다. 이 모임에 함께 하기 원하시면, 언제든 방문해주십시오. 일요일 11시에 오시면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 교제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기 - 홍콩우리교회 서현 목사포스트모던과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해야 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구분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신중하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7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때다 싶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손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걸 봤소. 당신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하는 거요? 당신, 가짜 선지자 아니오? 유대인을 구원할 메시야라면, 어떻게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고 손도 안 씻고 떡을 먹는 제자를 둔단 말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 즉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은 전통과 율법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입으로는 전통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킨다고 하는데. 실제로 너희는 전통도, 말씀도 어기고 있다.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느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라면서 부모님께는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걸 내가 다 알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통의 진정한 의미는 생명을 살리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손을 씻느냐 마느냐는 생명보다 덜 소중한 문제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성경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자주 공격했고,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여러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들의 욕심을 감추고, 거룩한 척했습니다. 실제로는 온갖 나쁜 일을 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하시자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예수님이 알려주자 그들은 예수님의 입을 막으려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전통’을 내세웠다면,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위선을 반복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속뜻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간섭받고 싶지 않아. 나도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 귀찮아’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부츠카리 오토코/온나’(ぶつかり男/女)가 사회 문제입니다. ‘부딪친다’는 뜻의 ‘부츠카루’에서 나온 말인데,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사람이나 걸음이 느린 사람, 아이를 보면 ‘길에서 방해되잖아!’라며 일부러 부딪히며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 공공도로에서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분노를 약자에게 쏟아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덩치 큰 남자나 힘센 사람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합니다. 그 결과, 큰 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힘을 얻는 일이 일어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힘을 잃어갑니다. 내 생각이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작은 유혹에 솔깃하고, 거짓 가르침에 넘어갑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본질을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가?”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는 일은 단지 지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고, 진리를 붙들고 생명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삶 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지, 어떤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사는지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느새 우리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곤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께서도 이번 한 주간 잠시 시간을 내어, 무엇이 옳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여러분과 사람들을 살리는 것인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쁘고 분주할수록, 잠시 멈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본질, 곧 생명을 살리는 진리를 오늘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도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작아 보이지만 중요한 것을 지키십시오 - 홍콩우리교회 서현 목사아들이 사용하던 랩탑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작동하지 않으니 당황스럽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확인해 보려고 노트북 하판을 분해해 봅니다. 분해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릅니다. 기계를 잘 모르는 저와 아들은 서로 멀뚱히 얼굴만 쳐다보다 컴퓨터에 입김을 불어보기도 하고, 괜스레 퉁! 퉁! 때려보기도 합니다. ‘중고로 산 노트북, 4년 썼으면 잘 쓴 거지’라고 위로해 봐도, 원인을 알면 고쳐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 노트북을 사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하는 마음이 들어 괜히 전원 버튼만 만지작거리며 껐다 켜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다고 고쳐질 리 없는 걸 알지만, 사람 마음이 언제나 이성적으로 반응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터넷에 물어봐도,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니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컴퓨터를 잘 아는 지인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이분도 말로 설명이 답답한지, 직접 가져와 보라고 합니다. 그분이 노트북을 분해하고 이것저것 이상이 없는지 확인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들의 표정은 경건과 경외입니다. 교회 예배 시간만큼 집중합니다. 한동안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 본 결과 내린 진단은, 메인보드 이상이었습니다. “목사님, 하지만 메인보드 전체가 망가진 것은 아닌 듯하고 전원 관리하는 칩이 문제 같습니다. 그 칩만 바꾸는 수리를 진행하면 계속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바쁘신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점검해 주신 분께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섭니다. “아들아, 고장의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니? 수리하는 곳을 찾아가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 사용할 때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부품. 당연히 작동한다고 여겼던 부품. 작지만 중요한 그 부품이 자신의 역할을 했기에 지금까지 문제없이 여러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망가지자, 그제야 그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고장 난 뒤에야 그 역할을 알게 된 칩처럼, 우리 삶에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서면 난감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이 고장 난 뒤 후회하기보다, 아직 온전할 때 그 가치를 알아보고 지키려고 애쓰지요.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뇌혈관이 막히면 손과 발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언어기능이 저하됩니다. 우리의 육체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도 비슷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계에 실낱같은 금이 가며 의심이 커지고 불신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작아 보이지만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사장이 준비해야 하는데, 제사장인 사무엘이 없자 왕인 사울이 제사를 드립니다. 사무엘이 그 일을 책망합니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사울의 눈에는 제사 드리는 그 행위 자체가 평범하고 사소해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 행위가 아니라,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지키는 것. 질서를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제사를 가볍게 생각했지만, 실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왕위를 내려놓고, 다윗이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들은 때로는 너무 작아보여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줍니다. 가볍게 차 한잔 할 수 있는 인간관계. 잠시 생각을 내려놓고 산책하는 시간. 정기적으로 드리는 기도.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교제. 가족의 사랑 등.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면 우리 삶의 작동을 멈출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작아 보이지만 우리 영혼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예배’를 말씀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멈춰 서 영혼의 호흡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바로 홍콩우리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혹시 삶의 무게에 지쳐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 같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정한 쉼을 갈망하신다면, 부담 없이 저희 교회 문을 두드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합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건강하시고, 새로운 한 달도 힘차게 맞이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뺨 한대로 바뀐 역사 - 홍콩우리교회 서현 목사제가 최근 읽은 “벌거벗은 한국사”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170년 음력 8월, 젊은 관료가 나이 든 대장군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마구 웃었습니다. 그날 저녁,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웃었던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궁궐 안 곳곳에 시체가 쌓였습니다. 심지어 왕조차 쫓겨났습니다. 무신들이 일으킨 반란이었기에 ‘무신정변’이라고 하는 이 사건 이후, 고려는 무려 100여 년간 무신이 지배하는 나라가 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고려에서는 무반과 문반을 합해 양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양반’이라는 말이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무반은 오늘날의 군인, 경찰과 같은 일을 했고 문반은 공무원이나 법관, 국회의원 등의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구분이 필요치 않았지만, 나라가 발전하면서 정치를 맡는 문신과 군사를 이끌 무신을 구분했습니다. 문제는, 이 구분이 세분화되며 일어났습니다. 무신은 진급에 제한을 두었고 문신은 제한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업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문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갑니다. 자연히 문신이 무신을 얕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심해지자 무신들의 불만이 점점 쌓여갔습니다. 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1170년 음력 8월, 왕은 무예 행사를 열어 무신을 위로하려 했습니다. 이 때 왕의 측근 문신인 한뢰라는 인물이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렀습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정도였습니다. 한참 어린 나이의 문신에게 대장군이 뺨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은 무신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문신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무신들이 왕의 측근인 문신들을 베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신이 나라를 다스립니다. 100년간 무신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행정을 담당하는 문신들이 없으니 제대로 운영될 리 없습니다. 긴 시간동안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왕을 비롯해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통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원래 고려는 국왕과 신하가 합의를 통해 이끌어가는 나라였습니다. 어느 한쪽이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가장 위험하게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합의와 원칙이 무너졌기에 차별과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모멸감과 분노가 오래 쌓이며 뺨 한대로 폭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신들은 권력에 취해 무신의 존재를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서로 합의를 통해 다스린다는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원칙을 너무 오래 방치했습니다. 그래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를 무시해도 반응하지 않으니 무시의 강도가 심해집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작용과 반작용이 일어납니다. 조용한 사람은 조용할 뿐이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한 사람은 참을 뿐이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개역개정) 이 말을 쓴 솔로몬 왕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후궁을 두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하지만,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위대한 왕이 되었지만, 그는 첫 마음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결국, 마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솔로몬 자신이 반면교사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파국을 막을 수 있을까요? 첫걸음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가 속한 집단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자기만의 시각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편견을 돌아보고 균형 잡힌 시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콩우리교회는 그런 모임이 되기를 꿈 꿉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흩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몰랐던 부분을 확인합니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나누며 격려하고 함께 울고 웃는 모임으로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홍콩우리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며 만들어가는 모임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중 마음을 함께 나누며 균형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홍콩우리교회에 한번 방문해보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화를 이루는 모임. 그래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한 주를 살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꿈 꿉니다. 더워지는 가운데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용기가 필요합니다 - 홍콩우리교회 서현 목사2021년, 한국의 한 투자회사 광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친구, 모두가 ‘아니오’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좋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소신 있게 투자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신념만으로는 시스템과 조직의 거대한 힘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례가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학살 사건입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은 그의 저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이 비극적인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1942년 7월 13일, 원래 평범했던 사람들이 강제로 예비 경찰대대에 징집되었습니다. 101 예비 경찰대대에 모인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중년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대신 유대인 학살 임무를 맡게 됩니다. “노동력 있는 유대인 남자들은 노동수용소로 이송하고, 여자와 노인, 어린이는 현장에서 사살해야 한다. 이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느끼는 대원은 앞으로 나오라” 여러분이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임무를 면제받기 위해 과연 앞으로 나섰을까요? 아니면 그 잔혹한 행위에 동참했을까요? 저자는 이들이 잔혹한 학살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몇 단계로 구별하여 기록합니다. 첫째, 대대 결성 직후 바로 학살 임무를 받자, 이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린이와 여자에게 총을 쏘는 일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첫 학살 작전에서 그들은 1,500명의 민간인을 죽였습니다. 그로 인해 대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환청과 환각에 시달립니다. 셋째, 그 결과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 대신, 사람을 죽이는 장소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덜어냅니다. 하지만 그 일 역시 분명히 학살에 동참하는 행위였습니다. 넷째, 불과 몇 달 후 이들은 무감각한 학살자로 변신합니다. 다섯째, 결국 대부분의 대원이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학살 자체를 즐기는 사람마저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거대한 권위에 복종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었습니다. 또한, 학살 임무에서 자발적으로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내 빠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빠지면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동료들이 놀려댈 것 아닌가? 그것은 수치다.”라며 임무에 참여했습니다. 조직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느니 차라리 임무에 참여해 여자와 어린이를 죽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저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문제의 근본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101 예비 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동시에, 그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학살 참여를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이 평범했던 것처럼, 학살을 거부한 이들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나약해서 차마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선’이라고 이야기하면 동료들이 ‘악’이 되기 때문에, 그저 이기적인 목적으로 임무를 피했을 뿐이라며 몸을 낮추었습니다. 비겁해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동료들에게서 고립될 두려움을 이겨낼 진짜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환경의 거대한 압박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소수지만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인류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성경도 우리가 어떤 공동체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환경의 압박과 잘못된 영향력 앞에서는 과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며 돌아설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속아 헤매지 마십시오.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은 생활 방식을 망쳐 버립니다!” (고린도전서 15:33, 새한글성경) 우리에게는 나쁜 영향력과 어울리지 않을 용기, 잘못된 흐름 속에서 바른 소리를 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는 건강한 모임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모임이 좋은 모임일까요? 여러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응원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모임입니다. 언제 가도 기쁘게 환영하며 맞이해 주는 따뜻한 공동체입니다. 홍콩우리교회는 여러분과 이처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낯설고 치열한 홍콩 생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매주 일요일, 따뜻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세상의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용기를 내며 담대하게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소문의 낙원’을 찾으시나요? - 홍콩우리교회 서 현 목사홍콩의 출산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며, 홍콩인 10명 중 8명은 자녀를 낳을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2026.4.15 홍콩수요저널 기사 참조) 하지만 걷다 보면 수많은 젊은이들을 마주합니다. 관광객도 있지만, 곳곳의 학교와 캠퍼스에서 꿈을 키우는 학생들의 모습이 더 눈에 띕니다.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많습니다. 홍콩한인유학생회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 본토를 제외하고 학부생 기준으로 한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습니다. 그 수가 약 3,800명에 이릅니다. 이 3,800이라는 숫자 뒤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곳까지 유학 오기 위해 거친 많은 일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홍콩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기 쉬운 도시입니다. 사람은 많아도, 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자기 이야기는 하지만, 내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타지 생활의 시행착오 속에서 “누군가 조언만 해 주었다면”하는 후회와 아쉬움을 겪은 적이 누구나 한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고, 비싼 물가에 밥 한 끼 먹는 일조차 망설여지곤 합니다. 언제나 긴장 속에서 살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듯한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도시는 우리에게 흩어져 있기를, 각자의 섬에 머물러 있기를 강요하는 듯합니다.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3,800명의 유학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홍콩에서 지내는 가운데 어려움은 없을까?’ 홍콩우리교회 성도님들은 생각했습니다. ‘유학생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 또,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해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고, 청년부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일요일 첫 예배를 드렸고, 고3에서 청년으로 올라가는 친구들과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적은 인원의 모임으로 시작되었지만, 의미 있는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모임을 시작해보니, 청년들의 배경이 모두 다릅니다. 직장인도, 학생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청년도,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있고, 홍콩에서 유학을 마치고 취직한 청년도 있습니다. 각자의 언어와 문화적 코드, 그리고 저마다의 아픔과 기쁨을 품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낯설었습니다. 화법도, 생각하는 방식도, 심지어 웃음의 포인트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진리에 동의했습니다.‘왜 나는 여기 있을까?’ ‘누군가는 나를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나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최근 악뮤가 발표한 노래 ‘소문의 낙원’ 가사 일부를 소개합니다. 잠깐 앉아요 / 따뜻한 스프와 고기가 있어요 / 지친 나그네여 / 도시에선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죠 / TV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게 있죠 / 소문의 낙원누군가 비웃으면 난 더 힘내요 / 물집을 터뜨리고 붕대를 감았죠 / 떠나야지만 알 수 있는 게 있죠 / 지치고 병든 나그네여 / 우 외톨이 나그네여 / 당신의 불치병은 그곳에 / 존재할 수 없어요도시의 생활에 지치고 힘든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댓글을 보았습니다. 멈춰 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떠나며, 안식과 쉼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잘 드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문의 낙원을 준비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준비해주시고,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존재하게 하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걸어나와, 서로와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지치고 병든 나그네와 같은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기적의 순간입니다.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혹시 홍콩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으신가요?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생이 있으신가요? 홍콩우리교회를 한번 방문해주세요. 한국에서 교회 다니지 않으셨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없으신 분이라고 해도 관계 없습니다. 홍콩에서 살고 있는 동포로서 한 마음을 품고 여러분들의 필요를 돕고자 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콩이라는 거대한 퍼즐 속에서,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던 마지막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홍콩우리교회를 한 번 찾아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배 후 교제와,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홍콩우리교회는 3,800명의 유학생이 쉴 곳이 되기를.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 힘을 얻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일요일 아침 9시 30분.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힘 내십시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소금 이야기- 홍콩우리교회 서 현 목사갑자기 더워졌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예년보다 더위가 늦게 왔다고 합니다만, 체감상 더위의 기세는 더 강해졌습니다. 저의 막내는 연신 땀을 닦으며 “아빠, 이제 더위 시작이에요? 그러면 여름에는 얼마나 더운 거예요?”라며 지레 겁을 먹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니 수분 섭취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수분 뿐 아니라 미네랄, 특히 염분 섭취도 중요합니다. 평소엔 잊고 지냈는데, 땀 흘리는 여름이 오니 군대 행군과 소금 생각이 나네요. 행군하기 전, 아스피린처럼 생긴 알약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소금과 미네랄 정제였습니다.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먹지 않은 병사들은 행군 중 픽픽 쓰러졌고, 지휘관이 혼냈던 기억도 있습니다.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소금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를 유지하고, 지구의 많은 인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소금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바닷물을 증발해서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땅에서 암염을 캡니다. 히말라야 핑크솔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세 번째 방법은 ‘용해채굴법’이라고 하는데, 지하로부터 소금물을 추출합니다. 일반적인 바닷물의 염도는 3% 정도인데, 이 소금물의 염도는 30% 입니다. 땅 속에 있는 암염층을 탐색하고, 시추공을 뚫습니다. 시추공에 물을 흘려 암염을 녹여낸 뒤 추출합니다. 현재 산업과 식용으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소금을 이 방법으로 얻습니다. 우리는 첫째, 둘째 방법은 잘 알지만 세 번째 방법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훨씬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통해 많은 소금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영역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단지 음식에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소금, 즉 염화나트륨은 오늘날 화학 산업과 제약 산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금을 원료로 한 화학제품으로 물을 정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세계 각국이 중요한 서류나 미술품을 소금 광산 깊은 곳에 보관합니다. 썩거나 곰팡이가 피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에너지부는 ‘전략 비축유’를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주 지하의 오래된 소금 동굴에 보관합니다. 자연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저장하고 대기 중 온실가스를 지하에 집적하는 공간도 있습니다. 소금이 가진 특성으로, 다양한 것들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배터리를 만드는 전해질의 원료로도 사용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알게 모르게 소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유지에 필요할 뿐 아니라, 사회와 문명 유지에 필요한 재료입니다. 홍콩의 식당에서 소금을 달라고 하니, 소금 병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볶은 쌀이라고 합니다. 습기를 머금어 못쓰게 되는 일이 없도록, 천연 제습제로 쌀을 볶아 넣어두었답니다. 사람들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금은 귀한 존재입니다. 현대에 들어 그 쓰임새가 더 넓어져, 더욱 귀한 존재가 되었지요. 저 같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채로, 소금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성경도 소금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임할 때, 미련을 품고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이 박제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수로 짠맛을 되찾겠어요? 아무 데도 더는 쓸모가 없어서 오직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마구 밟힐 뿐입니다.”(신약성경 마태복음 5:13 새한글성경)예수님은 우리의 본질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질을 잃은 소금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양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소금이기에, 더욱 본질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화학적으로 소금은 금속 양이온과 비금속 음이온이 이온 결합한 이온 화합물입니다. 전해질의 대표적인 물질이지요. 전기가 통하도록 하고, 흘러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시 이런 지식을 사람들이 몰랐기에 맛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사실 본질을 생각하면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흘려보내고, 흘러가게 함으로 살아나게 하라는 뜻. 생명을 유지시키고, 전하라는 뜻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의 다양한 영역을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 비유도 생각하고 묵상할수록 다양한 의미와 깊이로 다가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인생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 힘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생각보다 여러분의 존재는 귀합니다.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더 좋은 목표와 의미를 갖고 살기 원하십니다. 더운 여름, 미네랄 보충을 하시며 소금과 삶을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시는 시간을 갖는 것도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겠지요. 모두 더위 속에서도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힘 내십시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내용 참고 : “물질의 세계”-에드 콘웨이 저, 이종인 역) -
00를 기다리며- 홍콩우리교회 서 현 목사지난 24일 일요일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오신 날과 기독교의 성령강림절이 같은 날에 겹쳤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두 날 모두 ‘찾아오심’의 의미를 기념하는 점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좋은 소식, 뜻밖의 만남, 어둠 속에서 빛을 경험하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지요. 개인적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를 접했을 때의 여운이 지금도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다 지쳐 떠나고자 하는 ‘고고’와 그를 붙잡는 ‘디디’. 고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리는 두 사람. 막연하지만 간절한 기다림에 지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기념하는 성령강림절은 실체 없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잡으러 올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의미 있는 이유는, 약속이 실제로 찾아올 때 인간과 공동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절망, 두려움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분을 뛰어넘어 종과 주인이 하나 되었습니다. 민족을 뛰어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다’는 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의 굳은 틈에 스며드는 변화입니다. 딱딱한 마음이 풀어지고, 굳었던 생각이 유연해집니다. 한 개인이 우리 삶에 오면, 우리는 그의 영향을 받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성령이 오심으로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남을 말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44믿는 사람 모두가 한곳에서 지내며, 모든 것을 공유했다. 45모은 재산이든 있는 재산이든 팔아서 모두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46또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이는 데 힘을 쏟았고, 집집이 모여서는 빵을 떼어 나누었다. 그러면서 기쁨에 벅차 거짓 없는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다.(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44-46절. 새한글성경)지난 24일이 특별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홍콩우리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 했던 한 집사님 가정이 베트남으로 거처를 옮기는 인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홍콩에 왔을 때 정착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교회서 여러 일들을 드러나지 않게 잘 섬겨주셨습니다. 그 가정이 새로운 곳에서도 잘 정착하시도록 기도하는 중,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었습니다.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고, 홍콩에서 처음 맞이한 이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홍콩은 이동이 잦은 도시라 헤어짐도 많다는 이야기는 늘 들었지만, 직접 헤어짐을 경험하니 울컥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시작입니다. 그분과의 헤어짐은 언젠가 베트남에서 또 만날 만남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인생은 오고 가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만남이 있고 헤어짐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만남을 기대합니다. 만나서 사랑합니다. 또 새로운 만남을 꿈 꿉니다. 제가 홍콩에 오지 않았다면 그 집사님을 만나지 못했겠지요. 그 집사님 가정은 홍콩에서 받은 사랑과 정을 짐칸에 싣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 새기고, 새로운 땅에서 또 사랑할 사람들을 만날 일을 기대합니다. 그것을 교회 성도들이 모두 기대하기에 축복하며 보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를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헤어지더라도 또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힘이 됩니다. 그저 막연한 기다림 자체가 아니라, 기다리는 대상이 분명히 있는 그 기다림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더워지는 여름 날씨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기보다 번거로움으로 여기며 마음을 닫곤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열을 내는 덩어리로만 생각하며 짜증내고 거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그가 내게 찾아옴으로 내 인생이 변할 수 있습니다. 기다렸던 그를 만남으로 내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이루십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은 무엇을, 누군가를 기다리시나요?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홍콩우리교회도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교회 다닌다고 뭐가 바뀌나요?- 홍콩우리교회 서 현 목사초등학교 5학년 여름, 친구의 권유로 처음 교회 간 그 날 교회 선생님이 저를 반겼습니다. “처음 보는 친구구나, 어디 사니?” 모임 끝나고 저를 집까지 바래다주셨습니다. 그 이후, 매 주 일요일 아침이 되면 선생님이 교회 아이들과 함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현아, 교회 가자!” 저의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다니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목사가 된 지금도 어릴 때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 다니지 않는 분들. 특별한 종교가 없는 분들은 저의 할아버지처럼 이야기를 많이 하시곘지요.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일주일 내내 힘들게 일 하고, 주말에 겨우 쉽니다. 모두에게 일요일, 특히 오전 시간은 소중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인데, 교회 다니면 뭐가 달라지나요? 어떤 유익이 있어서 교회를 가야 하나요?” 신약성경 마태복음 4:23 말씀에 읽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새번역성경)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고치셨고, 죄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교회가 이어가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교회는 병원과 학교를 지었고, 가르치며 아픈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면 정말 떡과 돈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노력을 더 쏟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과 떡을 얻기 위해 인간관계를 맺지는 않습니다. 아무 말 않고 있어도 그저 편하고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내가 밥 사주고, 시간을 쏟으면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 힘을 얻는 관계도 있습니다. 문득 생각나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에 힘을 얻는 가족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관계의 확장입니다. 홀로 있는 내가 타인과 관계 맺으며 성장합니다. 관계 속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기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관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를 인정합니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시간, 공간, 수 같은 개념을 이미 갖고 있고 그 틀에 맞는 것만 인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의 틀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용서는 이성의 틀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의 인식은 확장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성을 뛰어넘어 영성까지 확장되는 경험을 ‘종교적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성이 극대화되는 현대 사회서 오히려 영성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더욱 늘고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여름성경학교 선생님은, 나에게 성경 구절을 가르쳐주기 전에 내가 사는 골목을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교회 아이들은 그저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었습니다. 그 작은 관계들이 쌓이면서 나는 서서히 배웠습니다. ‘내가 뭘 얻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오래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돈과 떡은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 때문에 울지 않고, 떡 때문에 웃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순간들은 대부분 관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과의 다툼,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락, 스승의 한마디. 교회는 그런 관계를 훈련하는 공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지요. 할아버지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교회 다니면 뭐가 바뀌나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쌀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쌀을 나눠줄 사람이 생깁니다. 돈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이 생깁니다. 일요일 오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내는 대신, 그 시간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일요일 아침마다 내 집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 그들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내게 준 것은 떡도, 돈도, 성경 지식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와서 말했습니다. “현아, 교회 가자. 네가 거기 있으면 좋겠어.”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게 남은 것처럼, 저와 홍콩우리교회도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그 말을 전합니다. 교회 가면 뭐가 바뀌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가 교회입니다.” 이번 주일,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교회에 한 번 오셔서 혼자가 아님을.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가? - 홍콩우리교회 서 현 목사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 간 교회서 예배드릴 때, 선생님이 기도하시고, 다른 친구들은 다들 손 모으고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선생님의 기도 소리를 듣는 것이 기도인가? 아니면 나도 소리를 내서 기도해야 하나? 소리 내서 기도하면 방해되니, 그냥 속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기도인가? 아무도 기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도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과 질문을 많이 품었습니다. 목사가 된 지금도 계속 배워가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물어보십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나요?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면 왜 기도해야 하나요?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해 교회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들어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No도 응답 중 하나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만 된다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도 응답입니다. Yes, No, Wait 모두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음…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와닿지 않는 대답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내 입장에서는 No를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결국 기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고 안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기도 응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행동심리학에서 이뤄진 실험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겠습니다. 2014년 시카고대학교의 심리학자 루시 센 교수는, 87명의 참가자를 모집하고 과제를 주었습니다. 한 참가자 집단에는 확실하게 2달러를 보상으로 주고, 다른 집단에는 50:50의 확률로 1달러 또는 2달러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센 교수는 보상이 예측 불가능할 때 참가자의 70%가 과제를 완료하였으며, 보상이 확실한 조건에서는 그 비율이 43%에 그쳤음을 발견했습니다. 불확실한 조건에서 동기부여가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불확실성이 주는 자극은 금전적 보상을 넘어서는 가치를 더해주었습니다.(“선택한다는 착각”-리처드 쇼튼 저. 이애리 역. 중) 2003년, 톰 섀디악 감독 짐 캐리 주연의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는 신이 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능력을 사용하며 좌충우돌하는 내용입니다. 기도를 다 들어주었을 때 세상이 어떻게 혼란해지는지 재치있게 묘사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도, 그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능력을 다시 신에게 반납합니다. 인지심리학적으로는 불확실한 조건에서 더 동기부여가 생깁니다. 영화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이 원하는 소망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더 많고 복잡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이유도 있지요. 이해하기 쉽게, 두 가지 영역의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할까요? 왜 기도해야 할까요? 들어주지도 않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또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가 잘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기도하지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보다 능력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신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각자의 신을 향해 부르짖지만, 성경은 그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잘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능력 있는 신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요청합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찾아와 나와 내 이웃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마음은, 결국 사랑입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도와달라고 외치는 외침은 하늘을 향해 울림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도 울립니다. 그 울림이 영글어 우리의 눈물이 됩니다. 천 마디 외침보다 한 방울의 눈물이,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탄소가 많은 압력과 열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 다이아몬드가 깎여 영롱한 빛을 비췹니다. 그와 같이, 우리 삶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외치고 흘린 기도와 눈물은 뜨거운 사랑의 징표로 남습니다. 변하지 않고, 잊혀지지 않으며 우리 삶에 영롱하게 빛납니다. 고통과 기쁨과 아픔과 눈물이 하나 되어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이 비밀을 알기에 기도합니다. 교회는 나와 이웃과 민족과 세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기도가 넓어질수록 사랑이 넓어지고, 기도가 깊어질수록 사랑이 깊어집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어 기도를 시작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작아져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의 끝은 사랑이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응답해주시지 않지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과 사랑을 담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십시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